유럽도, 조선도 이 ‘책’에 끌렸다
이민희 지음
문학동네
사대부 명망가 자제인 문장가 윤서(한석규)는 저잣거리에서 난생처음 음란소설을 접하게 됐다.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낀 윤서는 추월색이라는 필명으로 직접 음란소설을 쓰기로 한다. 이 분야의 일인자가 되고 싶었던 윤서는 가문의 숙적 광헌(이범수)에게 소설의 삽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탄생한 음란소설 ‘흑곡비사’는 장안의 화제가 된다. 2006년 개봉한 김대우 감독의 영화 ‘음란서생’의 내용인데, 소설책을 구하려고 소동을 벌이는 조선 시대 여성들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근세에 안방의 부녀자들이 경쟁하는 것 중에 능히 기록할 만한 것으로 오직 패설이 있는데, 이를 좋아함이 나날이 늘고 달마다 증가하여 그 수가 천백 종에 이르렀다. 쾌가는 이것을 깨끗이 베껴 쓰고 빌려주었는데, 번번이 그 값을 받아 이익으로 삼았다.” 조선 영·정조 시기 문인 채제공(1720~1799)이 쓴 ‘여서사서’(『여서사』의 서문)의 일부다. ‘패설’은 지금의 소설에, ‘세책가’라고도 하는 ‘쾌가’는 도서대여점에 해당한다. 영화 ‘음란서생’ 속 장면을 옮겨놓은 듯하다.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일, 또는 그 책을 ‘세책(貰冊)’이라 한다. 요즘은 드물지만 아주 오래전 일만도 아니다. 1990년대까지 아파트 단지마다 도서대여점 하나씩은 꼭 있었다. 또 도서대여 트럭이 방방곡곡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채제공의 ‘여서사서’는 그가 살았던 18세기에도 세책이 ‘안방의 부녀자들이 경쟁’해 ‘기록할 만할’ 정도로 중요한 사회적 현상이었다고 전한다. 바로 고전문학 연구자인 저자가 이 책에 담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세책은 18세기 조선에만 국한됐던 현상이 아니었다. 영국·아일랜드 등 서쪽으로 유럽 끝부터 일본 등 동쪽으로 아시아 끝까지,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저자는 생생한 기록과 사료로 18세기 세책이 유행한 배경과 경과를 국가별로 상세히 소개한다. 그 과정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책을 통해 주로 책을 구하는 쪽이 여성일 수밖에 없는 차별의 메커니즘도 보여준다.
장혜수 기자 hsc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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