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애써 지운 모든 것이 떠오를 때
냉정한 ‘이인칭’시점으로 풀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내일은 너무 멀다’(‘숨통’에 수록, 황가한 옮김, 민음사)
일상에서 우리가 말할 때 쓰는 시점은 보통 일인칭과 삼인칭이다. 나는 오늘 책을 읽었어, 혹은 그는 어제 점심에 방 청소를 했대, 라는 문장처럼 말이다. 너, 당신이란 대명사로 호명되는 이인칭은 평소에 거의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대화할 때 너는 지금 나를 보고 있다, 당신은 어제 버스 안에서 당신 어머니와 닮은 사람을 보았다, 라고 말하진 않는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살던 당신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도지에의 연락을 받고 18년 만에 여기, 매년 셋이 함께 여름을 보냈던 나이지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논소가 떨어져 죽은 아보카도 나무 밑에서 그해 여름을 떠올린다.
열 살이었던 당신은 이미 “어떤 사람들은 가만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큰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숨 막히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논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야만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깨달은 여름.” 당신과 논소, 도지에는 아이들이었다. 이들을 보호해 줄 어른은 한 명밖에 없었고, 그 어른이 관심을 쏟는 사람은 논소뿐이었다. 할머니가 없는 틈에 당신은 오빠에게 제안했다. 아보카도 나무의 꼭대기 가지에 누가 먼저 닿을 수 있는지.
그 여름 이후 18년 만에 도지에를 만난 당신은 알아차렸다. 도지에가 아직도 비밀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그의 시선을 피한다. 통증은 이전부터 느꼈다. 논소가 아보카도 나무에 올라가다 꼭대기쯤에서 머뭇거릴 때, 방심한 듯 보였을 때 그 밑에서 당신이 했던 말. 그 말은 되돌릴 수 없고 그해 여름은 돌아오지 않는다. 열 살이었던 그때 당신은 “구겨진 것을 보면 펴고 싶은 욕구, 울퉁불퉁한 것을 보면 평평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논소에게 겁을 주고 싶었다. 살아남고 싶었던 당신은.
그런 게 없는 삶도 있을 텐데, 종잇장처럼 납작하게 만들어서 치워 버렸던 모든 것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들, 갖지 말았어야 하는 감정들. 그런 순간이 떠오를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이제 당신은 운다. 아보카도 나무 밑에 홀로 서서. ‘당신’은 누구일까? 작가가 자신에게서 분리시킨 또 하나의 인물인가, 공감하고 개입하며 이야기를 읽어간 독자인 ‘나’인가? 이런 말이 괜찮다면 이인칭을 나는 강렬하고 냉정한 ‘자기 직면적 시점’이라 부르고 싶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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