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부끄러움과 죄책감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감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면서 서로의 욕구가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고, 인간은 도덕과 윤리, 법률을 만들어 이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도덕과 법률은 결국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훈련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루어진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이러한 가치들이 내면화되면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자신의 행위가 내면화된 어떤 기준에 충족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며 다음에는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의 행동을 조절한다. 이것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의 기능이다.
심리학자 에릭슨에 따르면 사람들이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내면화하는 시기는 두 살에서 일곱 살 안쪽이다. 이 시기는 자율성 대 수치(2~3세)와 주도성 대 죄책감(4~7세)이라는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는데, 아이들이 주로 부모 또는 가까운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때다. 아이가 첫돌이 지나면 배변훈련을 하게 된다. 이른바 기저귀를 떼는 것이다. 스스로의 몸을 통제하지 못해 아무 데나 대소변을 흘리고 다니던 단계를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기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다. 부끄러움, 즉 수치심은 배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을 때 최초로 경험되는 감정이다.
아이들은 배변 실수를 하거나 자신이 원할 때 배변이 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낀다. 물론 부모의 개입에 의해서다. 옛날에는 아이가 밤에 이불에 오줌을 싸면 키를 쓰고 나가 이웃집에서 소금을 얻어오게 했다. 부끄러움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금을 얻어오며 아이는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다짐했을 것이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본격적으로 바깥 활동이 시작된다. 네 살에서 일곱 살쯤은 부모를 따라 외출도 하고 다른 아이들을 만나 놀기도 하면서 슬슬 주도성을 연습하는 때다. 이 시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미운 일곱 살’이다. 미운 일곱 살은 벌써 삼사십 년 전 얘기고, 지금은 ‘미운 네 살’ ‘미운 다섯 살’까지 내려왔다. 이 나이대의 아이들이 미운 이유는 그들의 집요한 주도성 때문이다. 소위 ‘내 맘대로 하겠다’는 고집이 커지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주도성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중요한 능력이다. 그러나 여럿이 사는 사회에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주도성은 죄책감과의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다.
대여섯 살짜리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너 그러면 경찰 아저씨가 잡아간다” 등의 협박(?)이 끊이지 않는다.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고집을 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경찰 아저씨로 대표되는 사회의 법과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운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가정마다 자율성과 수치심, 주도성과 죄책감의 비중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자율성과 주도성은 수치심 또는 죄책감과 균형을 이룰 때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아무 데나 대소변을 흘리고 다녀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친구들을 때리거나 남의 물건을 망가뜨려도 죄의식이 없는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된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사회에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진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언제부턴가 부모들은 아이에게 좋은 것만 해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것 같다. 물론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사랑은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토록 자식을 사랑한다면 제 자식이 거리에 똥·오줌을 흘리고 다녀서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죄를 짓고 사회에서 격리되는 일 또한 바라지 않을 것 아닌가.
어쩌면 과거 한국의 양육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너무 강조했는지 모른다. 한 집에 아이가 6~7명씩이나 있던 과거에는 자식들 각자의 자율성과 주도성을 키워주는 것보다는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통제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불에 지도 좀 그렸다고 동네에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옆집 아이 코피 좀 냈다고 ‘순사’에게 잡혀갈 공포를 느끼며 자랐던 아이들은, 자신의 아이들은 그러한 부끄러움과 공포 없이 자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균형을 찾아야 할 때다. 그 변화는 가정에서 시작돼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내 자식을 등 따시고 배부르게 키우는 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 역시 부모의 할 일이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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