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독자 그 사이…지식의 고리를 연결하라[이은수의 아이겐밸류 - 인간의 고유함을 되묻다]

기자 2023. 8. 2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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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디지털시대 읽고 쓰기의 미래
인공지능 핵심기술의 수학적 근간을 이루는 선형대수학에서 아이겐밸류는 행렬변환 후에도 변화가 없이 그 자신으로 남는 고유벡터의 고윳값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인공지능의 파고가 모든 이들에게 다양하게 다가오겠지만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인간의 고유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오디오북·전자책·전자도서관 등…기술 발전이 가져온 책의 변화
한국이 미래 지식의 생산·소비를 혁신하는 모델을 선도해가려면
책의 관계망 보여주고 생각 공유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 필요하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편찬한 백과사전에 수록된 지식의 나무 그림. 디지털 기술 덕분에 지식들의 관계망을 그리는 것이 고도화 단계에 접어들 수 있게 됐다. 위키피디아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 손으로 옮겨 쓰던 책에서 기계로 인쇄하는 시대로 넘어오면서 책과 관련한 모든 형편이 다 나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변화가 다 이익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잠시 손익계산을 해보자.

지식을 듣고 말하던 시대에서 읽고 쓰는 시대로 넘어오면서 지식은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가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부터 시작하여 문자로 남겨진 지식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필요한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지만, 소리로 직접 들었던 때와 비교하면 독자들은 저자의 목소리로 지식을 들을 수 있었던 그 친숙함을 잃어버렸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 바뀐 덕분에 페이지의 구분이 생기고 그로 인해 책장을 넘길 수 있게 되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쉽게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읽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동시에 이로 인해 책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노력을 기울여보지 않고 작품의 흐름과 무관하게 특정 부분을 잘못 해석할 위험도 떠안게 되었다.

손으로 옮겨 쓰던 방식에서 활자로 인쇄하는 방식으로 넘어오면서 책의 가격이 낮아진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또 소유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누구나 인쇄기에서 찍혀 나온 비슷한 책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나만의 고유한 책을 소유하는 것은 한층 더 어려워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책은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글자로 읽을 뿐 아니라 소리로 듣고도 싶어하고, 발췌해서 읽을 뿐 아니라 전체 맥락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필요한 책을 쉽게 구하기 원하면서도 나만의 책으로 개성을 표현하기도 바란다.

기술의 발전은 읽고 쓰기와 관련된 이런 욕구들을 하나둘 충족시키고 있다. 오디오북은 디지털시대의 읽기에서 구술문화를 통해 누렸던 장점을 부활시켰다. 보통은 차분한 목소리의 전문 성우가 오디오북을 읽는 역할을 하지만 저자 자신이 낭독을 맡는 경우도 있다. 저자가 아무리 많은 형용사와 부사 그리고 긴 호흡의 문장과 짧은 문장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의미한 바를 세밀하게 표현하려 하여도 글자로는 마땅히 전달되지 않았던 그 행간의 의미를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자책은 책들을 무겁게 가방에 짊어지고 다닐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지식에 접근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가벼운 무게와 편리한 접근성을 전자책의 장점으로 먼저 꼽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의 발전과 관련하여 전자책이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을 재가공하는 일이 편리해졌다는 점 때문이다. 글자들을 광학판독을 통해 스캔하거나 전자책 파일을 활용하면서 이제 종이책을 뒤적거릴 때보다 훨씬 더 빨리 책 전체에서 원하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 덕분에 전자책은 책 한 권뿐 아니라 수많은 책들을 상호 참조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주요 개념어가 한 작품뿐 아니라 수많은 여러 작품에 걸쳐 어떻게 서로 비슷하게 또 다르게 사용되는지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디지털로 전환된 텍스트 정보는 컴퓨터로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로 활용될 수 있는데, 이 텍스트 데이터에 대한 정량분석이 가능해지면서 책을 자세히 읽기 전에 책의 주제나 문체 전체 개요를 파악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해졌다. 영문학자인 프랑코 모레티는 이런 읽기 방식을 “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전자도서관이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들과 독서 관련 애플리케이션은 책 안의 지식을 나만의 것으로 개인화하고 싶은 욕구를 채워주고 있다. 내가 밑줄 치는 내용들, 아껴두고 싶은 문장들, 구석구석 남긴 메모들을 통해 모두에게 똑같이 제공되던 책의 내용은 이제 나와 저자 간의 개별대화로 다시 기록된다. 비록 책을 나만의 것으로 독점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대신 책에 대한 개인적인 읽기 경험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결과로 우리 시대의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책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읽고 쓰는 것은 늘 종이책을 매개로 이루어진 까닭에, 종이책은 지식을 교환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차별화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식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졌다. 비단 오디오북이나 전자책뿐 아니라 동영상과 팟캐스트 등을 통해 다양한 경로로 지식을 교환하고 있는 이때, 우리 시대의 읽고 쓰기가 무엇인지 새롭게 이해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여전히 종이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들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종이책이 갖는 배타적 장점이 상당하더라도 다른 형태 지식의 생산과 소비도 결코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의 미래를 한번 상상해보자. 단순히 디지털시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논의해보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매리언 울프나 나오미 배런을 비롯한 디지털시대의 읽기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독서방식의 변화방향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한 바 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필요한 이야기는 독자들의 책읽기 방식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다양한 디지털 기술의 활용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책이 구현해야 할 텍스트 기술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많은 최신 기술에 대한 국제표준을 선점하려는 노력들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 책의 미래형태에 대한 표준을 도출하려는 노력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책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상들을 통해 한국이 미래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혁신하는 모델을 선도해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짧게 세 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첫째, 책의 관계망을 보여주는 기술적 장치가 필요하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 넘어오고 책들이 인쇄되기 시작하면서 독자들을 위한 여러 편의장치가 만들어졌다. 제라르 주네트가 처음 사용한 단어인 파라텍스트는 주텍스트(본문)를 중심으로 두었을 때 그 주변부에서 주어지는 부가적인 텍스트 정보들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책의 제목, 저자 이름, 장르 구분, 목차, 서문, 여백 주석 등을 파라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독자들은 수많은 책의 홍수 속에서 이 책을 읽을지 말지를 책 겉장이 담고 있는 정보, 추천사, 저자의 명성, 책의 서문, 그리고 책의 가치를 강조하는 출판사의 홍보문구와 같은 파라텍스트를 통해 판단하곤 한다.

그래서 보르헤스가 말했듯 서문을 비롯한 이 모든 파라텍스트는 독자에게는 일종의 대기실이기도 하며, 이제 독자들은 이 대기실에서 책 속으로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파라텍스트가 책의 홍보와 직결된 탓에 여러 형태로 발전해왔지만, 정작 이 책이 기존에 출판되었던 책들과 맺고 있는 관계망을 파라텍스트로 표현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덕분에 하나의 지식이 다른 지식들과 어떤 관계망을 갖고 있는지 지식그래프를 그리는 것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지금 펼치는 책이 전체 지식의 풍경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의 스케치가 가능해졌다. 책의 목차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비로소 책 전체 개요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책의 지식관계망이 만들어진다면 독자들은 이 책이 전체 관련지식의 덩어리 속에서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해봄으로써 지식의 바다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생각을 공유하며 읽을 수 있는 기술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책읽기는 외로운 작업에 머물렀다. 책의 여백에 남겨진 많은 독자들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 사라지거나 설령 보존된다 하더라도 다른 독자들의 생각과 함께 광범위하게 공유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책에 활자로 인쇄된 텍스트보다 그 텍스트의 여백에 기록된 생각이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350년 동안 증명되지 않았던 그 유명한 정리를 17세기 프랑스 수학자였던 피에르 드 페르마가 남겼던 곳은 3세기 고대 그리스 수학자 디오판토스의 책 여백이었는데, 이 몇 줄의 생각기록은 페르마 사후 30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로 역사에서 사라질 뻔했다. 같은 맥락에서 19세기 미국의 시인이었던 에드거 앨런 포도 여백에 글 남기기를 즐겨하여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페르마가 여백이 너무 좁아 증명을 적을 수 없었다고 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디오판토스의 책 여백에 적혀있었다. 위키피디아

“나는 내 책을 구할 때 항상 충분한 여백이 있었으면 했다. 물론 여백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지만 그 공간 안에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동의하거나 생각이 다른 부분, 그리고 짧은 비판적인 의견들을 적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적어두고자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여백의 좁은 한계를 넘어가는 경우에는 종이에 적어서 책갈피처럼 책 사이에 꽂아두기도 했다.”

페르마, 에드거 앨런 포, 마크 트웨인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여백기록은 그들이 소유했던 책들을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보존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지만, 책과 다양하게 씨름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은 마치 증발하듯이 사라져버렸다. 지금도 나의 책읽기와 너의 책읽기가 만날 통로가 많지는 않다. 그래도 여기저기 독서모임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독자들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에 조금씩 사회적 읽기가 확대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오프라인에서의 독서공유 경험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수도 제한적이므로 온라인에서 더 방대한 범위의 사람들이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읽기 플랫폼이 필요하다.

다행히 이런 새로운 시도를 위한 기술적 뒷받침은 이미 충분히 발전되어온 상황이다. 미국에서 몇몇 대학과 공공기관이 개발한 하이포서시스(Hypothesis.is)나 퍼루절(perusall.com)과 같은 서비스가 보여주고 있듯이, 이제 우리가 책의 여백에 기록한 독자들의 다양한 생각을 서로 공유할 수 있는 협력주석 도구(Social annotation tools)들을 활용할 수 있다.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의 발전으로 실시간 정보 공유가 가능해졌고 데이터 저장방식과 용량이 증대된 덕분에, 단순히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 이상의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외로운 읽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같은 텍스트를 읽고 저마다 갖는 다양한 생각들을 수집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시인의 의도를 맞혀야 하는 시험문제로 인해 많은 논란이 빚어져왔다는 점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이제 저자가 품었던 하나의 답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독자 100명, 1000명의 다양한 해석들에 더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셋째, 앞선 두 방향의 변화와 맞물리는 것으로서 저자 중심의 지식생산이 아니라 독자들이 지식생산에 유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구조의 책쓰기가 가능해질 필요가 있다. 이 제안은 독자들의 생각을 마치 저자의 생각보다 한 수 아래인 것처럼 여백에 가두어둘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생각이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는 본 텍스트의 공간 속으로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애초에 저자가 기록한 텍스트가 독자들의 다양한 생각들과 병합되어 새로운 텍스트로 변모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면 독자들은 소수의 저자가 탁월한 생각을 개진하는 어떤 책을 내놓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렸다가 그에 대한 반응만을 내놓을 것이 아니라 이 시점에 독자들이 듣고 싶어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성실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저자집단을 모집하거나 요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지금 출판시장에서 지식의 생산은 지나치게 소수의 명성과 그들의 관심에 기대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왜 지식을 생산하는 읽고 쓰기에 있어서 다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참여가 필요한가? 인공지능의 연산은, 제프리 힌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역폭이 거의 비슷하여 효율적으로 정보교환이 가능한 수많은 컴퓨터들의 대규모 병렬 연산이다. 컴퓨터의 통일된 정보의 연산과 대조적으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대화는 수많은 생각과 언어들을 서로 맞추는 조정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은 소수 몇몇의 천재적 지성을 가진 사람의 탁월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평범한 지성을 가진 일반 시민들의 생각을 모아 단순한 생각의 합을 뛰어넘는 생성을 이루어낼 방법을 찾을 것인가 모색하는 것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고유한 생각의 가치를 확보하는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물론 역사가 말해주듯이 다양한 생각들의 모음은 불가피한 충돌을, 때로는 불필요하다고 증명된 충돌을 낳는다. 인공지능의 병렬연산은 이 충돌이 아예 없도록 설계한 것이다. 우리 생각의 집합은 이 충돌을 더 발전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점에 중대한 차이가 있다. 다만 우리는 아직 서로 다른 생각을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연습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서 이제 연재는 인간의 고유한 지적능력으로서의 아이겐밸류를 찾기 위한 마지막 동사 “소통하다”로 넘어가 생각의 혁신을 이룰 소통의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수학, 서양고전, 과학사를 공부하였다. 카이스트에서 수행했던 인문학과 기술의 상호 발전에 대한 연구 및 강의를 바탕으로 서울대에서 디지털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인문학의 미래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과학혁명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학 및 과학적 지식의 생성과 발전 및 혁신 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이은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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