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R&D 예산 삭감의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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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해외 연구기관과 공동 연구를 하기로 협의하면서 100만달러(약 13억원)짜리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내년 예산 윤곽이 잡혀있던 상태라 지불 능력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관련 예산이 30% 정도 삭감이 되는 바람에 난감해졌습니다."
간담회가 끝난 뒤 만난 한 출연연 기관장은 "이런 식으로 예산이 깎여나가면 눈앞의 국제 협력이 어려워지는 걸 넘어 장기적으로 연구협력에서 한국의 국제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며 "서로 얼마씩 예산을 준비하기로 합의를 했는데 그게 갑자기 깨지는 일이 반복되면 어느 해외 기관이 한국과 같이 연구를 하려고 하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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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해외 연구기관과 공동 연구를 하기로 협의하면서 100만달러(약 13억원)짜리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정도 내년 예산 윤곽이 잡혀있던 상태라 지불 능력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관련 예산이 30% 정도 삭감이 되는 바람에 난감해졌습니다.”
지난 24일 서울 중구 서울중앙우체국 회의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원장이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다른 출연연 원장들에게 넋두리하듯 꺼낸 이야기다. 얼마 전 발표한 R&D 예산 개혁안에 대한 비공개 간담회 자리였다.
이날 간담회에는 학회 일정 때문에 빠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윤석진 원장을 제외하고 24개 출연연 원장이 모두 참석했다. 전국 각지에서 아침 일찍 상경한 출연연 기관장들의 모습은 이번 R&D 예산 삭감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보여주는 듯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 마디가 발단이 된 이번 조치로 정부의 주요 R&D 예산은 13.9%, 출연연 예산은 20% 가까이 삭감됐다. R&D 예산이 삭감된 건 33년 전인 1991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는 ‘카르텔’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써가며 R&D 예산의 비효율을 타파하겠다고 했다. 올해 상반기 국세 수익이 작년보다 40조원 가까이 줄었으니 여러 예산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R&D 카르텔을 들고 나왔다. 과학계는 종로에서 뺨 맞은 걸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격이니 황당할 따름이라는 반응이다.
이런 상황에서 출연연에 국제협력을 늘리라는 주문이 나왔으니 과학자들은 걱정이 더한다. 당장 연구 현장에서 만난 출연연 연구자들은 해외 학회 참석이나 논문 게재도 최소한으로 줄이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만날 기회도 없는데 어떻게 협력을 하라는 건지 물음표 투성이다. 졸속으로 진행된 예산 삭감이 앞뒤가 맞지 않은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간담회가 끝난 뒤 만난 한 출연연 기관장은 “이런 식으로 예산이 깎여나가면 눈앞의 국제 협력이 어려워지는 걸 넘어 장기적으로 연구협력에서 한국의 국제 신뢰도가 떨어질 수 있다”며 “서로 얼마씩 예산을 준비하기로 합의를 했는데 그게 갑자기 깨지는 일이 반복되면 어느 해외 기관이 한국과 같이 연구를 하려고 하겠나”라고 말했다.
그나마 과기정통부가 내놓은 국제협력 방안도 엉성하기 그지 없다. 과기정통부의 계획은 젊은 신진연구자를 분야별로 선발해 해외의 우수 연구기관에 파견한다는 내용이 전부다. 젊은 연구자를 미국 보스턴에 보낸다고 미국의 앞선 첨단바이오 역량을 우리가 따라 잡을 리 만무하다. 과학 연구는 대통령 순방이랑은 많은 게 다르다. 연구실 한 바퀴 돌고 석학과 웃으며 사진 몇 장 찍는다고 대한민국 과학기술 역량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현장 연구자들은 해외로 나가는 젊은 연구자들이 제대로 된 연구나 교육 기회도 얻지 못하고 해외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우리 혈세만 갖다 바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일은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야 하는데 지금 만들어지는 해외 협력 사업들은 제대로 된 검토도 없이 추진되고 있다. 지금 출연연은 물론이고 현장 연구자들은 갑자기 연구재단이나 정부에서 내려온 해외 협력 사업 기획안을 만드느라 작문 실력이 늘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확실한 건 윤석열 정부는 33년 만에 R&D 예산을 뭉텅 잘라낸 정권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점이다. 후유증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당장 올해 말, 내년 초면 과학기술계와 연구 현장이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책임은 그때 가서 물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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