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나목(裸木)
뜨거워서 싫었다. 장맛비가 폭우로 내리고 태풍까지 할퀴고 간 열사의 여름이었다. 이제 가을이다.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도 엊그제 지났다. 가을은 황홀하고 찬란하지만 들뜨지 않고 차분한 사색이 있어 나는 가을이 좋다. 우리 아파트의 길 건너 공원도 가을이면 다른 계절과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만난다.
여기저기 단풍의 모습이 화려하고 찬란하지만 이내 바람에 날리는 낙엽이 쓸쓸하고, 유치원·초등학교 어린이들의 귀여운 소풍이 있고 나무 그늘에 앉아 도시락을 펴놓고 행복해하는 가족과 친구들, 정겨운 연인들의 모습이 있고 산책을 하는 사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내 사색이 있다. 지난날의 나와 지금, 내일의 생각들이 벤치에 앉아 미팅을 한다. 가을의 공원은 그렇게 내가 나를 만나는 공간이고, 자연과 인생의 조그마한 전시장이다.
지난해 가을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흰 구름 흘러가는 파란 하늘을 나뭇잎 사이로 오랜만에 보았다. 하도 예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런데 낙엽 하나가 내 벤치 빈자리에 조용히 내려와 앉았다. 어느 날의 추억 같아서 버려둘 수가 없어 주머니에 가지고 왔다. 추억은 그렇게 아쉽고 늘 후회였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가을은 쓸쓸하다. 시도, 소설도, 영화도, 뽕짝도 그놈의 이별은 왜 그렇게 가을에 떠나는지. 낙엽 지고 바람 불고 궂은비 내리는 날 떠나야 할 사람인지.
어렸을 적에 나는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려 동네의 조그마한 교회당에 몰려다녔다. 그리고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고, 할머니의 손을 잡고 깊은 산속 절을 찾아 기도를 했다. 어디서도 좋은 생각 좋은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고 고요했다.
오래전의 일이다. 불교철학 교수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나는 가보지 않아서 사후에 극락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를 모른다. 하지만 부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극락이고 아니면 지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천당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부처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부처님의 말씀에는 사랑과 자비가 있고 욕심은 없었다. 가을의 공원에는 이런저런 단상들이 낙엽처럼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몇 해 전 늦가을의 공원이었다. 낙엽 지고 벌거벗은 나무 한 그루가 바람 속에 서 있었다. 내 모습이었다. '나목(裸木)'. 사는 게 그런 거다/ 바람 부는 벌판에/ 벌거벗고 서 있는 나무/ 살다보면 알게 되지/ 그것이 나라는 것. 나목(裸木)은 겨울을 나기 위해 마지막 잎새까지 내려놓고 봄을 기다린다. 자연은 필요한 만큼을 갖고 버릴 줄을 안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더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스스로 외롭고 힘겨운 건 아닌지.
어느 공원이나 강변에서도 좋고 카펜터스의 '예스터데이 원스 모어'가 흐르는 조용한 카페에서도 좋고 아니면 내 방 책상 앞에서도 좋다. 낙엽 날리는 사색의 계절에 나를 돌아보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나를 아는 것. 그 이상의 철학도 없고 철학자도 없다. 이 계절은 우리 모두 철학자다. 가을이니까.
[신대남 한국대중문화예술평론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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