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수 방류 첫날, 대통령은 또 숨었다[김민아의 훅hook]
‘김민아의 훅hook’은 이슈의 핵심으로 ‘훅’ 들어가 ‘hook’을 날리는 코너입니다. 3주마다 찾아옵니다.
2023년 8월 24일 오후 1시3분.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일본이 후쿠시마 제1원전의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떠내려보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30년, 어쩌면 훨씬 더 오래 지구환경에 영향을 미칠 중대 사건이다. 이미 존재하는 인류는 물론, 앞으로 태어날 인류도 자유로울 수 없다.
앞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오염수 처분이 완료될 때까지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한국·일본을 방문한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20년 후, 30년 후에도 계획대로 되는지 확인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시다 총리나 그로시 사무총장은 ‘영생’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 거대한 재난을 영원히 책임질 수 없다.
전대미문의 위협 앞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 한국의 최고지도자는 조용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방류 시작을 3시간 앞두고 ‘킬러규제 혁파 규제혁신 전략회의’에 참석했다. 주요 경제단체장, 기업 대표들과 함께 산업단지 입지·화학물질 관리·외국인 인력활용 등 ‘킬러규제’ 혁파에 대해 논의했다. 후쿠시마 바다에서 떠내려오고 있는 진짜 ‘킬러’는 외면한 채.
일본 정부가 ‘오염수 해양방류를 24일 시작한다’고 발표한 22일, 정부 입장을 밝힌 이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무총리도, 부총리도, 장관도 아니었다. 박구연 국무조정실 1차장이었다. 국조실은 총리를 보좌하는 기관이고, 1차장은 차관급이다.
박 차장은 “오염수 방류에 계획상의 과학·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면서도“정부가 오염수 방류를 찬성 또는 지지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했다. 방류 계획은 문제없다고 보지만 찬성하는 건 아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희대의 궤변을 연상케 했다.
정부 전체가 차관급 한 명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방류 시작일인 24일엔 방기선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의 대국민 담화가 예고됐다. 그러더니 한덕수 총리의 담화 발표로 바뀌었다. 여론을 의식해 차관급→장관급→총리로 격상된 것이다.
한 총리는 담화 발표에 앞서 원고를 언론에 배포했다. 사전 원고는 “국민 여러분, 오늘 오후 1시 일본 측이 오염수 방류를 시작했습니다”란 문구로 시작했다. “오염수 방류가 아예 없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이라는 표현도 들어있었다.
생중계된 담화 내용은 달랐다. 서두는 “국민 여러분, 오늘 오후 1시 일본 측이 오염수 처리, 과학적으로 처리된, 방류를 시작했습니다”로 바뀌었다. ‘과학적으로 처리된’이란 표현을 넣으려다 보니 말이 꼬인 것이다. 후반부에 들어있던 “오염수 방류가 아예 없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도 빠졌다. 대신 “과학적 기준과 국제적 절차에 따라 처리되고 방류된다면”이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한 총리는 “과도하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지금 우리 국민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은 가짜 뉴스와 허위 선동”이라 했다.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수입규제 조치도 견고하게 유지하겠다”고 덧붙였다. 총리실은 담화문 수정과 관련해 “용산(대통령실)에서 빼라고 해서 뺀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CBS노컷뉴스 보도).
정부와 여당은 ‘과학’을 강조하며 오염수 방류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괴담’으로 몰고 있다. 이들이 앞세우는 근거는 IAEA 최종보고서다. 윤 대통령도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국제적으로 공신력 있는 IAEA의 점검 결과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했다.
IAEA는 그러나 과학·학술단체가 아니다. IAEA는 웹사이트에서 스스로 “원자력 기술의 안전하고 확실하고 평화적인 사용을 ‘촉진’하기 위해(to promote the safe, secure and peaceful use of nuclear technologies)” 일하는 기구로 명시하고 있다.
오염수 방류를 ‘사실상 찬성’하는 이들은 해양 방류 외에 실현가능한 대안이 없다는 주장도 내세운다. 하지만 태평양도서국포럼 전문가 패널이 오염수의 ‘고체화’를, 일본 시민사회가 견고한 대형 탱크를 지어 보관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다. 세계 최고의 부자국가 중 하나인 일본이 값싼 길을 택했을 뿐이다.
윤석열 정부는 그동안 오염수 방류에 대해 물으면 동문서답을 되풀이해왔다. ‘후쿠시마 수산물이 국내에 들어올 일은 없다’는 답이다. 그러나 오염수 방류 자체가 안전하다면서, 그 오염수를 버린 바닷물과 거기서 포획·채취된 수산물은 안전하지 않다고 한다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일본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를 철폐하라고 대대적 압박을 가해올 가능성이 크다. 대일관계 개선을 위해서라면, 강제동원 피해배상이든 오염수 방류든 줄줄이 양보해온 정부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금지라고 지킬 수 있겠나.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통령실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총리 입장이 대한민국 정부 입장”이라며 “정부 입장은 명료하고 간결할수록 좋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수능 ‘킬러 문항’까지 ‘깨알 지시’할 때와는 판이한 태도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해도 한국에 위험하지 않다’는 취지의 정부 홍보 영상 제작을 대통령실에서 직접 주도했다고 한다. 국조실은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말하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진실’ 유튜브 영상 제작비 3800만원이 대통령실 예산으로 집행됐다고 밝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민 안전 홍보에 대통령실 예산을 집행하는 건 예산 운영 취지에 부합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쯤 됐으면 국민도 눈치챌 만큼 챘다. 대통령은 더 이상 숨어선 안 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우리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수 있는 (한·미·일) 3국 협력의 혜택과 이득이 증대될 것”이라며 “위험은 확실하게 줄어들고 기회는 확실하게 커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국민은 그러나 혜택·이득·기회가 아니라 ‘위험’을 체감하고 있다.
지난 6월 공개된 한국일보·일본 요미우리신문 공동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의 83.8%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왔다. 한국 정부가 오염수 방류를 두고 볼 수밖에 없다면, 그 이유를 대통령이 직접 밝혀야 한다. 설득도 설명도 없이 국민 10명 중 8명을 ‘괴담 세력’으로 모는 건 민주주의라 부를 수 없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하라. 직접 질문을 받고, 답을 하고, 책임도 지라.
김민아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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