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재난 애도는 죽은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

한겨레 2023. 8. 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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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김준혁의 의학과 서사(76)
재난을 애도하며 안윤의 ‘방어가 제철’ 읽기
반 고흐(1890)의 ‘슬픔에 찬 노인’(영원의 문에서).

몇년 동안 여러 재난이 반복되고 그로 인한 수많은 죽음이 있었지만, 피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2014년 세월호, 2015년 메르스, 2020년 코로나19, 2022년 이태원을 호명해 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막막함과 알 수 없는 후회뿐. 이들 재난으로 인하여 떠나가신 분이 근처에 없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너무 큰 일들이다 보니 무력하게만 느껴져서 그런 것은 아닌가도 싶다.

한편으론 이런 죽음이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설명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되는 것을 의미할 텐데, 예컨대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은 하나의 서사로 정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왜 그분이 코로나19에 걸렸는지, 왜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실은 주어졌으되 그것을 이어 붙일 수가 없어 사건들은 떠다니기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해야 한다. 재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책임의 방기라는 죄를 짓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딜레마가 아닌가. 재난으로 인한 죽음들을 제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가 안윤의 단편 ‘방어가 제철’을 읽으면서 비슷한 감각을 느꼈다.[1] 작품에는 두 죽음이 병치되어 있으며 하나의 죽음은 다른 하나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다. 하지만 죽었다는 사실이 그저 던져질 뿐,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는 작품이 끝난 다음까지 공백으로 남는다. 작품을 읽으며, 나는 개별적인 죽음의 사실들과 그 설명될 수 없음을 곰곰이 생각한다. 그 설명될 수 없음을 그냥 놓아두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방어의 계절’이 돌아오듯 반복되는 애도

‘방어가 제철’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화자가 예전 오빠의 친구였던 정오를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다. 오빠는 14년 전,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화자의 어머니는 그런 세상을 술로 견디다가 간암이 재발하여 3년간 투병하다 임종을 맞았다. 그런 어머니의 죽음을 화자는 하나의 물질처럼 감각한다. “임종은 몇 번인가 아주 가까이 엄마에게 다가왔다가 물러갔다.” 그것은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오빠의 죽음을 바라보던 화자의 인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온몸의 뼈가 부스러져 의식을 잃은 오빠를 내려다보며 엄마는 통곡했다. 시간이 멈춘 듯 더디게 흘러갔다.” 그 죽음의 단차가 이야기를 뒤에서 끌고 간다.

이전 오빠와 단짝이었던 정오를 화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오빠가 죽을 때, 정오는 찾아오지 않았다. 대학생과 고등학생이었던 그들은 이제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되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만나 식당에서 함께 식사한다. 둘은 아직 오빠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다. 화자는 어려운 형편에 자신이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것 때문에 오빠가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보이지 않으나, 정오 또한 어떠한 이유로 친구의 죽음을 오랫동안 마주하지 못한다.

간간이 이어지는 둘의 식사는 긴 애도 의식처럼 읽힌다. 세 번의 겨울이 돌아오고, 둘은 겨울마다 같은 식당에서 방어회를 먹으며 술을 기울인다. 그러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정오는 친구의 유해를 뿌린 바다에 다녀올 용기를 낸다. 화자 또한, 정오에게 봉투를 내민다. 그것은 오빠가 정오에게 빌린 것이니 나중에 갚으라며 주었던 학원비다. “허리를 수그리고 소리 없이 눈물을 떨어뜨리던 그가 기어이 흐느꼈다. 정오와 나는 얼마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서로는 오빠의 죽음을 말하고 듣는 거울과 귀가 되어, 오빠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음으로 말한다. 그렇게 둘은 오빠를 애도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애도 의식은 하나의 종결로 기능하지 않는다. 겨울이 반복되고 “방어가 제철인 계절이” 돌아오듯, 그들의 애도는 반복해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두 죽음에 대한 애도이자, 이미 떠나간 옛날에 대한 애도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그 순간을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안윤의 ‘방어가 제철’. 애도를 주제로 한 ‘달밤’, ‘방어가 제철’, ‘만화경’ 세 단편과 에세이 ‘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가 수록되어 있다. 출처: 알라딘

정리할 것인가, 마음에 남겨둘 것인가

애도를 이야기하면 먼저 프로이트를 살피는 것이 좋다. 그는 논문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는 애도작업을 거친다고 말했다.[2] 사랑하는 이에게 쏟아지던 마음이 그 대상의 부재로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마음을 정리하는 일을 애도작업이라고 부른 것이다. 애도작업에 성공하면 그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애도작업에 실패하면 그는 멜랑콜리의 상태, 자기분열적 우울에 빠진다.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자는 자기 비난과 우울증에 빠진다. 따라서 프로이트의 애도작업은 성공적으로 마쳐야 하는 개인의 과업이다.

데리다는 프로이트의 애도작업을 비판하면서 애도가 어떻게 작업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3] 프로이트의 방식을 따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마음이 정리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그를 내면화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나로 만든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은 참 상식적이다. 우리는 죽은 사람을 남겨두고 걸어가야 하니까.

그러나 그런 애도작업의 끝에 무엇이 남는가. 더는 나와 다른 사람으로서 사랑했던 그는 남아있지 않다. 남는 것은 동일시를 통해 내 추억의 전당에 고이 모셔진 그다. 더는 슬픔을 느끼지 않도록, 나는 그를 향한 마음을 갈무리한다. 이런 애도작업은 나를 위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대방을 향했던 마음은 잘 정리되어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향한 것, 그를 제대로 슬퍼하기 위한 것, 그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데리다는 말한다. 애도작업은 성공함으로써 실패한다. 애도작업의 성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로부터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도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애도는 불가결한 것이며 데리다 자신 또한 먼저 떠난 동료 철학자들에게 바치는 애도사나 애도의 글을 여럿 발표하였으며, 그 안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애도를 행한다. 그에게 애도는 이미 떠난 그와의 대화다.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남은 자는 어떻게든 죽은 자를 되살리려고, 그가 다시 말할 수 있게 하려고 몸부림칠 뿐이다. 프로이트의 애도작업처럼 사랑하는 이를 정리하는 대신, 데리다는 그를 계속 마음에 남겨두려 한다. 슬픔이 계속 남아 있기에,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그런 애도는 한편 상대방의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그가 여전히 나와 함께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태도에 가깝다. 그것이 역설적이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애도라고, 또는 애도의 불가능성이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단 불가능하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아듀 레비나스’.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소개하면서도 강하게 비판하는 ‘폭력과 형이상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레비나스로 하여금 자신의 사유를 점검하게 하는 한편, 프랑스 바깥(특히 미국)에 레비나스의 철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데리다와 레비나스는 서로 비판적 영향을 주고받는 친구로 남는다. 레비나스가 세상을 떴을 때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를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출처: 문학과지성사

‘다른 애도’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

다시 안윤 작가의 작품으로 돌아가 불가능한 애도를 엿본다. 화자도, 정오도 서로를 통해 죽은 오빠를 되살려내려 한다. 그들의 애도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애도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나를 넘어 다른 사람으로 향하려는 모험이므로. 그들을 통해, 오빠는 살아갈 것이다.

슬프게도, 또는 안타깝게도 우리에겐 그런 애도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특히 거대한 재난으로 인한 상실에 대해선 더 그렇다. 무엇이든 빨리빨리 해결해야 해서 그럴까. 아니면 우리는 애도함에 있어 지극히 기능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일까. 세월호도 이태원도, 빨리 슬퍼하고 치우라는 목소리가 들렸던 것은. 메르스와 코로나19로 인한 죽음이 그저 숫자로만 남은 것은.

물론 계속 슬픔에만 잠겨 있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은 자들의 자리가 남아있지 않은 것이 우리가 어느덧 성공과 성취를 자랑하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면, 그래서 애도작업 또한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것만을 서로에게 기대하고 있어서라면, 그것은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온당한 애도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것은 그 죽음들 앞에서 윤리적인 태도는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미 죽은 자를 기억하고 어떻게든 그들을 되살려 내려 하는 것이 철학자의 말놀음 빼고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극복해 내야 할 슬픔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같은 방식으로 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른 애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떠난 이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나는 (다시 데리다를 따라) 그것이 떠난 이들을 대신해 말하며, 떠난 이들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데리다는 철학자 레비나스에게 바치는 조사(弔詞) ‘아듀 레비나스’에서 말한다.[4] “즉, 곧바로 말하는 것, 타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고 흠모하는 타자를 위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관해 말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이미 떠난 타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것은 그를 위해, 그의 편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는 이야기다. 죽은 사람을 위해, 죽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것.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재난 앞에서 해야 할 것도 이야기다. 쉽고 단순한 이야기로 그들을 정리해 버리는 대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 그러려면 우리는 아마 다시 애도를 배워야 한다.

참고문헌

안윤. 방어가 제철. 자음과모음. 2022.

지크문트 프로이트. 윤희기, 박찬부 역. 정신분석학의 근본개념. 열린책들. 2020.

왕은철. 프로이트와 데리다의 애도이론—“나는 애도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영어영문학. 2012;58(4):783-807.

자크 데리다. 문성원 역. 아듀 레비나스. 문학과지성사. 2016.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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