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책 읽기, ‘세책’으로 취미가 되다[북리뷰]
이민희 지음│문학동네
돈 내고 책을 빌리는 행위
한국 영·정조 때 소설 읽기 열풍
“서적행상이 베껴 쓰고 빌려줘”
동·서양 모두 18세기에 유행
특권층 남자만의 학문인 독서
누구나 향유 가능한 오락으로
독일·미국 등 다니며 20년 집대성
전세계 ‘세책 독서지형도’ 완성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인재(人災) 가운데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한 것이 바로 소설탐독이다. 조선 후기 한글을 깨친 부녀자들은 소설을 경쟁적으로 빌려 읽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를 두고 정약용은 “지혜를 미혹에 빠뜨리며” “교만한 기질을 부추긴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체적 독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의 신분을 알 수 있는 대목인 데다가, 오늘날 소설과 독서의 위상을 생각하면 더욱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반응이다. 연습 없는 인생에 간접 체험과 지혜를 주고, 디지털 시대에도 가장 추천되는 교양 활동은 문학 읽기 아닌가.
그런데 독서는 언제부터 본격적인 ‘취미’가 됐을까. 소설 읽기의 시작과 유행에 관해 살펴보는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공부가 아니라, 소비 행태로서의 독서의 기원을 찾는 것. 저자는 18세기를 전후해 전 지구적 현상으로 나타났던, 돈을 내고 책을 빌리는 ‘세책’(貰冊) 문화를 주목한다. 지식인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소수 남성만 누리던 학문적, 종교적 수양 활동이었던 독서가 누구나 향유할 수 있고, 취향을 고려한 오락 행위로 변모하는 데에는, 저렴한 값에 책을 빌려주던 세책업자들이 크게 기여했다. 주요 독자들은 여성이었다. 저자의 연구 역시 18세기 조선 사대부가 여성들이 국문소설을 몰래 빌려 읽었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책은 한·중·일, 미국과 유럽, 남미,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발견한 세계 곳곳의 세책 관련 기록을 집대성했다. 한마디로, 세계 세책 독서 지형도인 셈.
동아시아에서 세책 독서가 가장 활발했던 건 한국과 일본이다. 조선 시대 세책 독서 인기는 앞서 정약용뿐 아니라 여러 기록이 증명한다. 예컨대, 영·정조 때 요직을 맡았던 채제공은 부녀자들의 패설(소설) 읽기 경쟁이 “능히 기록할 만한” 수준이라며 그 행실을 경계하는 글을 남겼다. 그는 “쾌가(서적행상)는 이를 깨끗이 베껴 쓰고 무릇 빌려주곤 했는데, 번번이 그 값을 받아 이익으로 삼았다”면서 세책업의 생생한 풍경도 전한다.
19세기에는 외국인의 시선이 추가된다.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당시 서울에만 세책점이 최소 7개 있으며, 한문본과 국문본이 수백 종 있다고 증언한다. 또 다른 선교사 앵거스 해밀턴은 여성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국문 소설의 내용을 모르면 따돌림을 당했다고 했다. 1918년 서울 세책점 36곳을 조사한 에드윈 쿤스는 세책점 운영 방식의 흥미로운 점을 잘 포착했다. 세책업자 중에는 여성도 있었는데, 그들 중엔 술집이나 여관 주인도 있었다는 것. 책은 이를 “안정적 수입을 위한 겸업”으로 분석한다.
일본은 18세기 초부터 무사들이 모여든 도쿄, 여행객으로 북적대던 교토, 그리고 상인들의 메카였던 오사카 등에 세책 업자들이 생겨났다. 19세기 초에는 도쿄에 800여 개, 오사카에 300여 개가 됐고, 세책점 조합이 결성될 정도로 번성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여성 세책업자들이 일찌감치 존재했고, 이들 중 일부는 매춘을 겸했다는 기록. 저자는 세책업의 형태가 주로 행상이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기에, 여성들이 책 대여뿐 아니라 또 다른 요구를 받기 쉬웠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책업자의 신분이나 세책업의 규모 등 한국과 일본은 서로 큰 영향을 주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책 문화를 발달시켰는데, 쇠퇴 과정은 비슷하다. 그것은 신문을 통한 세계와의 만남, 즉 보다 개방적이고 빠른 독서의 출현과 출판 시장의 형성으로 책 가격이 저렴해지기 시작해서다.
저자의 ‘세책 지도’는 동아시아를 거쳐 유럽 세책 문화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인쇄 출판의 요람인 독일을 들러 소비 독서의 천국인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들 세책점의 특징은 독서 클럽이나 커피 하우스 등 살롱의 형태로 바뀌고, 점차 오늘날의 북카페와 같은 복합 문화 공간으로까지 진화했다는 점이다. 한 장소에 모인 독자들은 서로 책에 대한 평판을 확인하는 등 정보 교환을 하고, 작가에게 개작까지 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세책 업자들은 독자를 늘리기 위해 도서 목록을 적은 카탈로그를 제작해 배달해주기까지 했다. 그 풍경이 오늘을 꼭 닮았다. 그러니까 세책점은 오늘날 ‘취향의 독서’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독서 역사의 한복판에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세책점은 눈앞에서 사라졌지만, ‘책 동네’ 사람들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순전하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책에는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저자가 본업이나 주 전공이 아닌 ‘세책’ 관련 연구를 이토록 집요하고 꾸준하게 해올 수 있었던 과정도 담겨 있다. 세책을 통한 책의 유통과 당시의 독서 풍경에 국한된 책이지만, 경험한 적 없는 18세기 각 도시의 ‘책이 있는 풍경’ 속으로 잠시 다녀온 기분. 그것으로, 우리 또한 세책점의 증인으로 충분하다. 276쪽, 1만7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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