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좌파·우파 아닌 예술파… ‘합리’ 추구한 조각에 한국 정체성 담아”[M 인터뷰]
현실을 바탕으로 한 예술 추구
우리 역사·정신 조각에 담고파
내년 ‘시립김영원미술관’ 개관
작품 258점 모두 꺼내 손질 중
인체 소재로 한 구상조각 몰두
동양의 氣 표현해 해외서 인정
이념 아닌 합리적 사유로 판단
이승만·박정희·해리 트루먼 등
동상 제작 거절할 이유 없었다
“50년 넘게 조각을 하면서 ‘죽기 전에 꼭 우리 정체성을 회복하는 예술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내 일생의 숙제였어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우여곡절도 많이 겪었는데, 어느 정도 보여주는 단계에 왔지만 아직도 쉴 수가 없어요.”
한국 구상조각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영원(76) 작가는 내년 자신의 이름을 달아 문을 여는 ‘김해 시립 김영원미술관’ 개관을 준비하며 돌아본 자신의 조각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근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갤러리 코사’에서 문화일보와 만나 “작품 258점을 기증하게 된 만큼 옛날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모두 꺼내 살펴보고 있다”면서 “내년 김해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에 맞춰 문을 여는 만큼 지역 주민들의 문화 향유를 키우고 국내 조각 미술을 더 알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립미술관에 예술가의 이름이 달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아직 살아 있는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평생 구축해 온 작품세계에 대한 미학적 검증을 통해 미술사에 이름이 새겨져야 하고, 미술관이 들어설 지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도 인정받아야 한다. 그만큼 김 작가의 존재가 한국 현대 조각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단 뜻이다.
김 작가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 6월 개인전이 막을 내리자마자 다음 달 열리는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SEOUL·키아프)에 출품할 작품을 준비하면서 연말에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예정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과제들이 남아 있어 쉴 수도 없다”면서 “여전히 해야 할 작업이 산적해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전 정부 등의 비협조로 제작한 지 7년이 돼서야 빛을 보게 된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동상이 정전 70주년을 기념해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 설치되는 모습도 지켜봤다.
2016년 완성된 이승만·트루먼 동상은 전 정부 등의 비협조로 7년 가까이 빛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달 정전 70주년을 기념해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지에 설치됐다. 김 작가는 “우리나라 지도자들 모두 공과(功過)가 있지만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버릴 사람은 없다. 이 전 대통령은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방향을 제시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가난한 나라에서 풍요로운 경제 대국으로 가는 기초를 닦았다”면서 “역사엔 가정이 없고 그때 김일성은 프롤레타리아 경제를 들고나왔다. 결과를 놓고 보면 무엇이 옳았는지 나오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옛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에 10명의 대통령 동상도 제작했다. 나를 두고 좌파인가, 우파인가 묻는데 나는 예술파”라면서 “합리적인 정신으로 볼 때 동상 제작 의뢰를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최근 조각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고 있지만, 김 작가가 50년 넘게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 예술과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그의 철학과 시도는 늘 몰이해의 범주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각인생을 두고 “해방에 6·25전쟁까지 치르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당시엔 현대미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방법론도 없었고, 선배들은 해외 미술사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서양미술의 아류가 아닌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한 예술을 보여줘야 하는 게 다음 세대인 나의 숙제였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서양미술의 아류’를 거부한 그가 추구한 조각이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추상이 아닌 구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8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한 김 작가는 스승과 동료의 권유에 따라 추상조각에 입문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김 작가는 “기존 질서와 역사를 부정하는 서양식 사고가 팽배했고 추상이 아니면 작가 취급을 안 하던 당시에 학생미술 대회에서 추상으로 조각 부문 최고상을 받았고, ‘내 작품은 전통에 대한 부정의 미학’이라고 으스대며 어깨에 힘 넣고 다니기도 했다”면서 “그런데 우리 전통은 서양과 다르지 않으냐. ‘일본에 30년간 시달리던 우리 역사와 정신을 왜 부정해야 하는가’란 생각이 들며 나 자신과 예술에 대한 부끄러움이 생겼고, 사실주의에 입각한 구상조각으로 접근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체성이 결여된 추상조각 대신 구상조각을 하겠단 선언에 김 작가는 한순간에 조각계 기대주에서 이단아로 전락했다. 그는 “지도하던 교수, 선배들이 나를 보고 왜 서양에서 버린 사실주의를 하냐고 비판했지만, 나는 현실을 바탕으로 예술을 하려고 했다. 실존주의적 관점과 맞닿아 있던 것”이라며 “마침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서 당시 현실을 담은 ‘어느 사형수’란 작품을 내놓자 우호적이었던 주변 동료들이 전부 내게서 돌아섰다”고 말했다. 그는 진부한 예술이라는 부담 속에서도 ‘중력, 무중력’ 연작으로 대표되는 사실적 기법에 토대를 둔 정통 구상조각 세계관을 일궜다.
김 작가의 인체를 소재로 한 구상조각은 그가 신체가 가진 에너지를 표현하기 위해 동양 전통의 기(氣) 개념을 활용하며 꽃을 피운다. 정신과 육체, 혼돈과 질서를 잇는 수단으로 예술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기능을 회복시킨다는 논리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서 있는 ‘그림자의 그림자(꽃이 피다)’는 김 작가의 이런 예술적 성취가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이후 개념미술이 인기를 끌던 1990년대엔 기를 표현한 퍼포먼스와 조각으로 해외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김 작가의 ‘조각-선’ 퍼포먼스는 1994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동양의 정신과 현대미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고 극찬을 듣기도 했다.
김 작가가 추상조각 시대 속에서 홀로 구상조각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예술정신이다. 그는 “(1970년대는) 근대화를 위해 과학에 기반한 합리주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며 “이런 측면에서 사실주의로 접근한 것이고, 우리의 옛 문화를 탈피하는 게 아니라 되살려 새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내 미학론이다. 이것을 뿌리로 삼아 후배들이 더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했다.
■ 김 작가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청남대 대통령상 10명 빚어… 50년간 인간 내외면 형상화
사실주의에 입각한 구상조각을 일관해 온 김영원 작가는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형상화하는 인체 조각의 대가다. 가족 나들이객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데 모이는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의 상징인 세종대왕 동상이 바로 김 작가의 손이 빚어낸 걸작이다. 김 작가는 사람의 동상을 제작할 때 단순히 얼굴만 보지 않는다. 동상이 설치될 장소, 역사성, 시대성까지 고려한다.
그는 “세종대왕 동상을 설치할 때만 하더라도 공모 과정에서 그 자리에 맞는 완벽한 세종대왕을 구현하기 위해 보름 동안 광화문을 찾았다”고 말할 정도다. 지역 관광명소가 된 옛 대통령 휴양지인 청남대에 위치한 10명의 전 대통령 동상을 제작할 적임자로 김 작가가 꼽힌 이유이기도 하다.
항상 “죽기 전에 꼭 우리의 뚜렷한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게 나의 숙제”라고 말하는 김 작가는 한국 조각가들의 구심점 역할도 해 왔다. 홍익대 교수로 오랜 시간 후학을 양성해 온 김 작가는 한국조각가협회(KOSA) 설립을 주도하고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국내 첫 조각 아트페어 ‘서울국제조각페스타’를 개최하는 등 조각시장 외연 확장에도 기여했다.
강단에서 물러나고 조각가를 위한 일선 역할도 후배에게 양보했지만 조각가로선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보인다. 2013년 대리석 조각의 본고장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세계적인 조각가 노벨로 피노티(Novello Finotti)와 2인 전시를 진행한 것은 한국 조각계의 쾌거로 꼽힌다.
피노티는 자신의 제안으로 연 이 전시에서 김 작가에 대해 “흥미로운 조각가로 작품이 강렬하고 매력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 작가는 내년 개관할 김해 시립 김영원미술관을 통해 신진 조각가들의 길을 터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내년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가 열리면 김해 곳곳을 젊은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꾸며 문화체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김 작가는 “젊은 조각가들이 대중과 만날 기회가 많이 없다. 일반인들이 쉽게 조각을 접하고 즐기는 기회를 열고 싶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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