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대가 서용선 그림을 뜯어보다
묘사는 의미보다 중요한 것인가?
400여년 전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이던 오스만투르크의 수도 콘스탄티니예(이스탄불) 궁정의 전속화가들은 고민에 직면하게 된다. 먼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는 원근법 원리가 교역국인 베네치아의 서양화가들에 의해 전파되면서 실감나는 묘사의 신세계가 알려지게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청금석 같은 돌가루 안료로 색의 심도를 추구하면서 지극히 정묘한 세밀화로 신과 권력의 본질을 드러내려했던 기존 화가들은 걱정했다. 원근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써서 일상의 사물과 사람을 본뜨는 데 몰두한다면, 그런 작업이 위대한 신의 존재 같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보다 우선이라면, 굳이 그림의 깊이와 의미를 따질 필요가 없지 않은가.
노벨상 수상작가인 튀르키예 문인 오르한 파묵이 2000년대 초반 발표한 소설 <내 이름의 빨강>에서 궁정화가들끼리의 살인과 반전으로 점철되는 극중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서구식 묘사방식에 대한 의문과 반발이었다. 검붉은 색과 짙푸른 청록색의 선과 덩어리들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뒤엉킨 모습을 그려온 지금 한국 화단의 대표화가 서용선(72)씨의 지난 40여년 작업들을 그러모아 뜯어본 서울 북촌의 한 전시회는 바로 이 소설이 짚은 문제의식을 소설의 제목과 함께 독특한 기획틀로 끌어왔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1, 2층에서 열리고 있는 서작가 서베이 특별기획전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이 바로 그 현장이다. 이 전시장의 출품작들은 마치 미지의 공간을 떠다니면서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인간의 도시공간과 역사의 단면을 담은 그림들이 울긋불긋한 화면들 속에 갇힌 채 한쪽이 바깥 풍경으로 환하게 뚫린 전시장 여기 저기에 매달려 있다. 삶의 행위와 죽음의 정적, 먹고 걷고 손을 뻗는 군상들과 죽어서 막대처럼 널브러진 주검들, 무심히 바라보는 하늘과 땅, 도시공간 지하철의 구획된 무심한 표면들이 반원형의 공간 곳곳에 펼쳐지고 있다.
지난 40여년간 그렇게 한국과 미국, 독일, 중국, 일본의 도시와 지역의 자연에 걸친 역사 공간을 전방위적으로 탐색하면서 자기 눈과 몸이 개입한 흔적을 남겨온 서용선 작가는 80년대 초기 작품부터 최근 작품까지 70여점의 작품을 내놓았다. 전시는 삶과 도시, 삶과 정치, 삶과 자연을 주제로, 3부의 구성을 취한다. 단종 애사, 한국전쟁 등 우리 역사의 비극적 상황을 다룬 역사화, 도시인 군상 다룬 도시화로 알려진 작가의 작품세계를 색조와 구도 등 미술언어의 맥락에서 심도 있게 분석한다.
전시의 1부는 삶과 도시 편으로, 1980∼1990년대 작가가 서울대 미대 교수시절 미아리에서 정릉, 숙대입구, 총신대역, 낙성대까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했을 당시 창밖으로 보이는 대도시의 가로와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주로 나왔다. 뉴욕, 베를린, 베이징 등에서 전철 등의 대중교통수단을 타고 다니며 몸으로 겪은 도시의 군상과 구조를 보여준다. 2부는 이런 도시화에서 더 나아가 과거사와 보편적인 삶과 죽음의 양상들 속에서 인간의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다.
들어가면 바로 눈앞에 다가오는 가로 1.9m, 세로 2.6m짜리 대작 ‘빨간 눈의 자화상'을 작가적 주체의 탄생으로 상정한 기획자는 다채로운 일상과 역사의 풍경을 오버랩시킨다. 작가가 조선시대 단종의 비극이 깃든 청령포의 풍경과 생육신 김시습의 가부좌한 모습, 한국전쟁의 희생자와 피난민들, 한일병합의 근원인 루스벨트·태프트·가쓰라로 대표되는 구한말 미국과 일본의 정객들과 2000년대 초반 공들였던 강원도 철암 탄광촌 풍경, 전쟁 때 마루 밑에 몸을 숨기며 밥을 받아가는 아버지, 미국에서 레지던시를 하면서 게걸스럽게 밥을 탐식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 등을 나열한다.
이 전시의 특장은 작품 배치방식이 특이하다는데서 나온다. 작가가 주로 쓰는 붉은색과 죽음의 이미지들은 도드라지게 강조되지 않지만, 특설 스탠드 가벽에 도시화와 특징적인 인물군상을 붙여 화자처럼 전시공간 중간에 띄워놓고 다양한 시선과 시점을 관객들에게 유도한다. 김장언 기획자는 재맥락화라는 다분히 난해한 용어를 썼지만 기실 전시의 핵심은 그의 작품들이 지닌 그린다는 회화의 펼침 공간에서 대상을 보고 그리는 묘사가 아니라 대상을 파악하고 표현하는 회화적 의미 자체에 방점을 찍고 있다.
2층의 경우 전시장 안쪽에서 작품들의 뒤편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실존을 위해 갖가지 자세를 취하고 마치 개의 몸짓처럼 무언가 행위를 하는 ‘개사람’이 기하학적 그리드로 쳐진 철암의 공간과 서로 다른 피부색과 정체성의 사람들이 손을 맞잡는 화합 사이에 놓인 구도를 볼 수 있다. 군부독재시절 군인들의 정치인으로 변신한 군상을 담은 1986년작 ‘정치인’이 스탠드 가벽에 붙어있는 모습은 그 뒤 안쪽 벽에서 한일병합의 막후 주역이던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태프트의 초상을 그린 작품들과 겹쳐진다. 모두 역사인물화들인데 작품들을 보는 시선의 엇갈림과 미끄러짐을 통해 색다른 성찰을 이끌어낸다. 어떤 역사와 자연 공간이든 직접 몸으로 뛰어들어 겪으면서 감각을 발산하고 성찰하고 작품으로 기록하는 작가의 성정 자체가 극명한 시각적 이미지로 전화되면서 육박해오는 것이다. 1980~90년대 초반 양화 스타일로 정연하게 붓질하던 형상이 2000년대 이후 휘갈기는 듯한 이른바 ‘스트로크’ 스타일의 거친 표현적 선으로 변모하는 양상들도 1, 2층의 작품들 행렬을 보면서 은연중에 확인하게 되는데, 서양화법에 길들여진 작업방식을 뒤늦게 벗어나려는 자기극복의 치열한 단면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연과 신화 속에서 작가의 보편적인 세계상을 탐구하는 그림들을 모은 ‘삶과 자연’ 주제의 3부 전시는 9월 15일 3층에서 시작한다. 1~3부 전시는 10월 22일까지 이어진다.
아트선재 말고도 서 작가의 신구작 전시회는 서울과 남도에 있는 다른 세 개 공간에서도 다발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지난 4월부터 서울 방이동 스페이스 138에서는 중견비평가 이인범씨의 기획으로 역사화, 풍경화, 자화상 등 작품 30여점을 선보이는 ‘서용선, 삶의 노래’ 전(30일까지)을 진행 중이다. 전남 무안군 오승우미술관도 지난 12일부터 서 작가와 나오미 작가의 2인 초대전(11월5일까지)을 열어 최근 서 작가가 답사한 남도의 자연과 문화유산, 사람들의 풍경 서사를 담은 그림들을 선보이고 있다. 무안에서 지척인 전남 신안군 암태도(암태면 단고리 99-1번지)에서는 작가의 현지 작업실 개방 전시회(오픈 스튜디오)가 28일부터 9월1일까지 열린다. 일제강점기 암태소작항쟁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1년부터 현지 창고를 창작공간으로 바꿔 벽화와 드로잉 등을 그려온 그의 작업 흔적들을 연극배우들의 현장 실험극(28~29일 오후 공연)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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