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네…아모스 오즈 장편 '블랙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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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나는 이혼 뒤 7년간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린 전남편 알렉스에게 편지를 쓴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의 편지, 전보, 메모 등의 글로 이뤄진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편지와 편지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가 없고, 전보나 보고서 형식의 글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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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일라나는 이혼 뒤 7년간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린 전남편 알렉스에게 편지를 쓴다. 예루살렘의 가난한 프랑스어 교사 미쉘과 재혼해 딸을 낳고 살던 일라나는 알렉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보아즈의 폭행 사건 해결을 위해 돈을 요구한다.
정치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고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는 알렉스는 지급을 보증한다는 내용의 냉담한 답신을 보내오고, 일라나는 다시 펜을 든다. 둘이 과거에 얼마나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했는지, 그리고 결혼생활은 또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회상하며.
현대 이스라엘 문학의 거장 아모스 오즈(1939~2018)가 1987년 발표한 장편 '블랙박스'는 가족의 의미와 사랑의 정체성을 유대인들의 고난의 역사를 배경으로 섬세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인물들의 편지, 전보, 메모 등의 글로 이뤄진 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다.
편지와 편지 사이를 이어주는 이야기가 없고, 전보나 보고서 형식의 글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튀어나온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다른 사람의 편지로 넘어가면 그 전의 편지와는 다른 관점과 기억의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편지가 가진 한 방향의 소통 특성 탓이다. 이 때문에 소설은 처음엔 불친절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작가가 고도로 계산한 문학적 장치다. 쓴 사람에 따라 급격히 변하는 문체와 감정선은 서로 맛이 다른 다채로운 양념처럼 소설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소설 제목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블랙박스는 비행기가 추락하면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들여다보는 운항기록장치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한 블랙박스를 들여다볼 일은 없다. 그러나 어떤 일을 계기로 생에 균열이 찾아오거나 중요한 관계가 끝장나는 경우, 뒤늦게 블랙박스를 꺼내 메시지를 해독하며 과거를 곱씹어야 할 때가 있다.
오즈는 마치 항공사고 조사관들이 블랙박스를 수거해 들여다보듯이 서신들에 담긴 사랑, 책망, 증오, 후회 등 복잡다기한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더듬어간다.
독자는 작가가 배치한 각종 편지와 전보, 사설탐정 보고서 등을 읽으며 조금씩 등장인물들이 겪은 감정의 진폭을 확인하게 되고, 편견과 오해를 풀며 서서히 화해로 나아가는 모습에 감동하게 된다.
이 소설엔 작가의 자전적 서사가 짙게 담겨 있다.
우파 시온주의 집안의 학자 아버지 밑에서 자라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반항해 15세에 공동생활촌인 키부츠로 들어간 오즈는 이념 전쟁, 빈부 격차, 인종 갈등 등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스라엘 현대사의 질곡을 작품에 녹여냈다.
한국 독자들로서는 생소할 수도 있는 역사적 사건과 지명, 유대인들의 풍습과 종교 용어가 많이 나오지만,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역자들의 꼼꼼한 주석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기존에 국내에 소개된 오즈의 작품 중에는 영어판을 옮긴 중역이 있는데 이번 '블랙박스'는 현대 히브리어 완역본이다.
소설의 배경과 시대가 어디가 됐든 뛰어난 문학작품이 주는 감동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케 해주는 수작이다.
민음사. 윤성덕·김영화 옮김. 472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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