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우고엔 고주센”…100년 전 일본, 발음 못하면 살해당했던 그 단어 [북적book적]
참사 후 조선인 학살 재조명 서적 봇물
한일 전문가 “과거 직면해야 양국 관계 개선돼”
[헤럴드경제=신소연 기자]“1923년 9월 1일 정오 2분전, 그 순간 지구 일부분이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1898~1975)의 서사시 ‘15엔 50전’은 100년 전 일본 간토(일본 혼슈 동부) 지방을 강타한 관동대지진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 작품은 당시의 혼란, 특히 광기에 어린 조선인 학살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시의 제목인 ‘15엔 50전(일본어 발음 쥬우고엔 고주센)’은 조선인을 가려내기 위해 자경단(주민 자치 경찰)이 사람들에게 시켜 본 일본어였다. 당시 간토 지방에 일자리를 찾으러 간 조선인들이 일본어를 잘하지 못한 점을 노린 것이다. 이 발음이 어눌한 오사카, 오키나와 등 지방 사람들도 조선인으로 오인돼 죽임을 당했다.
올해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그간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참사 이후 혼란을 틈타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한일 관계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과거사를 바로 보지 않으면, 허울 뿐인 관계일 수 밖에 없다는 양국 지식인들의 뼈아픈 반성에 따른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0년이 됐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 시작됐고, 대중을 위한 첫 역사서인 요시무라 아키라의 ‘관동대지진’이 1973년에야 출간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인 대학살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입을 모은다.
관동대지진 이후 발생한 조선인 학살은 그간 자경단의 자위적 방어 활동의 일환이었다는 일본 극우학자들의 주장이 정설이었다. 일본 정부가 대지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자 자경단이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사망한 조선인이 적게는 231명(일본 내무성 경보국 집계), 많게는 6661명(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보도) 등으로 규모가 큰 점을 고려하면 극우학자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역사 전문기자 출신 와타나베 노부유키는 그의 신작 ‘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에서 극우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한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의 논문 ‘경찰 민영화:일본의 경찰, 조선인 학살 그리고 민간 경비 회사’에서 근거로 제시한 당시 신문 보도와 조선총독부 자료 등의 재검토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려 한다. 그는 최근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신문기사는 교통과 통신 두절로 인해 대단히 제한된 환경에서 제작됐고, 램지어 교수는 그마저 일부만 인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조선인 학살을 일으킨 핵심 유언비어는 조선인이 집단 무장해서 공격한다는 것”이라며 “일본군이 진압한 19세기 말 동학 농민전쟁과 1919년 3·1운동 등에 대한 복수의 두려움과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에 대한 반감이 학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와타나베는 다만 일본 정부의 조직적 개입에 대해선 부정적이었다. 그는 “요코하마 지역의 경우 학살은 지진이 발생한 1일부터 시작됐지만, 당시 8개의 경찰서 중 7개가 파괴돼 중앙 정부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며 “계엄령 역시 학살이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3일에 내려져 (학살에) 군의 개입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국내 저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김응교 문학평론가는 신작 ‘백년 동안의 증언’에서 학살의 원인이 됐던 유언비어가 정부에 의해 유포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저서에서 “조선인 학살이라는 ‘집단적 광기’의 발단은 계엄군이 만들어 뿌린, “센징(鮮人)을 조심하라”고 쓰인 삐라에서 출발했다”며 “계엄군이라는 국가의 묵인에 따라 자경단이나 일본 국민이 기계처럼 폭력을 행사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일본 당국은 지진으로 인해 정부로 향하는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을 조선인에게 향하도록 했다”며 “조선인을 학살하는 주체도 국가가 아니라 자경단으로 보이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조선인 학살의 원인에 대한 분석은 저마다 다르지만, 해법은 모두 한 방향으로 흐른다. 아픔의 역사이긴 하지만 이를 바로 보는 과정을 통해 과거사를 청산해야 건강한 한일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해법은 쉽지 않다.
와타나베는 “한국 정부가 우선 (역사적 사실 중) 알고 싶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는 게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며 “학술 대회나 컨퍼런스 등 민간 레벨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평론가는 저서에서 “한일 사이의 백년을 기억하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기회”라며 “피해 의식이나 자학적 태도가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과거의 기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황모과는 그의 신작 SF(Science Fiction)소설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을 통해 한일 양국 모두의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한국인 민호와 일본인 다카야는 아시아 홀로코스트 진상규명 위원회 조사단으로서 100년 전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확인하고자 그 시대로 타임슬립한다. 이 프로그램의 허점은 단 하나. 과거 사람을 죽이거나 팀원의 살해를 방조할 경우 예상치 못한 에러가 발생한다는 것.
소설에서 민호는 타임슬립을 할 때마다 학살을 막으려 애쓰다 죽임을 당해 통신이 끊어지지만, 이를 모른 척 한 다카야는 미래로 소환될 날만을 기다리며 괴로운 삶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이 임무를 끝내는 방법은 단 하나. 동료의 죽음 없이 서로 협력해 조사를 끝내는 것. 조선인을 구하려고 사지(死地)에 뛰어든 민호의 목숨을 구한 다카야는 정부 공식 문서가 삭제되기 전 모처에 숨겨 놓은 후에야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일방의 노력만 가지고는 양국의 아픈 역사를, 그로 인한 뿌리깊은 적대관계를 결코 개선할 수 없다는 방증이리라.
〈참고문헌〉관동대지진, 학살 부정의 진상/와타나베 노부유키 지음·이규수 옮김/삼인
백년 동안의 증언/김응교 지음/책읽는 고양이
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황모과 지음/래빗홀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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