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무게를 덜어내는 법, 어둡고 이상한 양꼬치집에서 [책&생각]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가끔 아들들과 역할극을 한다.
내가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들들을 할머니라 부르고, 아들들이 나를 손자라고 부르며 조손 사이인 척하는 것이다.
문명이 만들어낸 오랜 습속과 규범 안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관습의 무게를 덜어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원시 인류에 비해 수없이 많은 역할을 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현실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을 간접체험해 보는 것은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아은의 책들 사이로]
양꼬치의 기쁨
남유하 지음 l 퍼플레인(2021)
가끔 아들들과 역할극을 한다. 내가 서른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아들들을 할머니라 부르고, 아들들이 나를 손자라고 부르며 조손 사이인 척하는 것이다. 평소 맡아온 가족 내 역할과 성별을 뒤집어 ‘가장 말이 안 되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놀이는 잠깐이지만 쏠쏠한 해방감을 준다. 이런 시간은 ‘가족’이라는 인류의 오랜 제도 안에서 살아가며 내가 때로 버겁게 느끼는 ‘역할’의 하중을 줄여준다. 문명이 만들어낸 오랜 습속과 규범 안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관습의 무게를 덜어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원시 인류에 비해 수없이 많은 역할을 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소설 속 인물을 통해 현실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일을 간접체험해 보는 것은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신은 인간에게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주었고, 인간의 뇌는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실제 그 일을 했을 때와 유사한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인간만이 보유한 유희요, 무기이다. 어떤 용도의 무기인가? 인류가 만들어내고 대대손손 강화해온 거대하고 견고한 ‘문명’으로부터 도피하는 무기다.
‘양꼬치의 기쁨’은 부부의 대화로 시작한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심드렁한 대화가 오간 뒤, 아내는 혼자 집 근처 양꼬치 집으로 향한다. 추어탕집, 칼국숫집, 순댓국집이 들어섰다 차례로 망한 뒤 새로 들어선 가게다. 아내가 양꼬치를 주문하지만, 주인에게서는 양꼬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뭐가 주문 가능하냐 물으니 추어탕, 칼국수, 순댓국이 가능하다는 답이 날아온다. 그리고 엉뚱한 대답이 날아오는 이 순간부터 독자는 직감한다. 이 소설이 현실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리라는 것을. 큭큭 웃으며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아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특별한 고기를 먹고 있는 장면과 맞닥뜨린다. 평범한 부부의 심드렁한 대화로 문을 연 작가는 독자의 손을 잡아챈 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음모와 토막 살인과 기묘한 요리의 장면으로 끌고 간다.
15페이지 분량의 짧은 소설을 읽는 데는 채 십 분이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읽고 나서 마음에 이는 움직임은 거세다. 독자는 어둡고 음산한 양꼬치 집에 들어가 놀라운 장면과 맞닥뜨린 뒤, 그때껏 당연시 여겨왔던 모든 것이 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상한 후련함, 이상한 웃음, 이상한 희망에 빠져든다. 힘겹게 느껴지는 일상의 모든 의무와 관계가 실은 별것 아니며 우리는 한없이 가벼운 대기 위에서 그저 떠다니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한세상, 굳이 심각하게 살 필요가 없고 그저 원하는 것을 하면 다 해결될 것 같은 느낌. 순전한 공상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단 1%도 없다 하더라도, 낯선 세상에 한번 몸을 담갔다 온 것만으로 독자는 그저 생을 여유 있게 관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리노 나쓰오와 미나토 가나에를 연상케 하는 이 서늘한 소설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한 판 게임 혹은 짧고 저릿한 휴식 역할을 해내는 기담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소설가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서초 초등교사 사건, 확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뉴스AS]
- 일본, 벌써 “수산물 수입규제 없애라”…방어 논리 없는 한국
- “친일 음악가 안익태의 ‘애국가’는 불가리아 민요 표절곡” [책&생각]
- 푸틴, 프리고진 사망에 조의…“유능했지만 실수도 했다”
- 오염수 방류 직격탄 어민·상인들 “IMF·코로나도 이렇진 않았어”
- [단독] 김현숙 주재 ‘잼버리 회의’ 5차례, 폭염 대책 논의 전무
- 274m 공중 아슬아슬 12시간…케이블카 8명 어떻게 버텼나
- [Q&A] 자가검사 두 줄 떴는데 PCR 검사비 내야 하나요?
- 손목밴드도 박테리아 온상…95%서 발견, 소독은 어떻게?
- [단독] 노동위 인정 부당해고에 조사관이 “노조 빼고 합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