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 뒤 뭉개기만 하는 어른들을 태우겠다는 아이들 [책&생각]

임인택 2023. 8. 25.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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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작가 케빈 윌슨의 장편
화나면 불타는 아이들로
사랑·책임·가족 본질 톺아
‘현실불가’의 발칙한 사실주의로
‘왜 이건 현실일 수 없는가’ 물어
미국 사우스대(스와니 캠퍼스)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케빈 윌슨(45). ‘신경 좀 꺼줄래’는 그의 세번째 소설이다. 사진 © Leigh Anne Couch, 작가 누리집

신경 좀 꺼줄래
케빈 윌슨 지음, 홍한별 옮김 l 문학동네 l 1만6000원

국외 도서가 소개될 때마다 따라붙는 현지 매체의 서평은 으레 화려하다. 2000년대 전후 논란이 됐던 국내 ‘주례사 비평’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문학동네가 들여온 이 소설의 뉴욕타임스 서평 한 줄은 “신이시여, 이 책이 얼마나 좋은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이다. 국내 파급할 만한 수사는 아니다. 현란해서만이 아니다. 책을 본 뒤 신에게 희구할 말이 있다면 “그럼에도, 신이시여, 여기 이 아이들은 또 버려졌습니다”이겠다. 유례없는 저출생 시대에 목도 중인 유기, 미등록, 아동학대 사망….

2019년 미국 장편소설 ‘신경 좀 꺼줄래’는 어린이들이 지상에서 필요로 하는 돌봄의 자세와 윤리에 관한 여러 층위의 함의를 담고 있다. 진부한 서술이다. 발상과 상징, 전개가 실로 기발하니까.

소설은 세가지 점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첫째, 가식 없이 모순된다, 어른들만. 제 마음 때로 저도 모르고 알라치면 변한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미워한다. 서로를 이해하나 쌍욕을 던진다. 아이들은 가식 없이 일관된다.

둘째, 이런 사태와 심리를 눈앞에 재현하듯 필치가 거침없다. 누가 언어는 사고를 담는다 했던가. 말은 사고를 허무는 세찬 물이다.

“나(릴리언)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를 몰랐다. …근데 매디슨은, 씨발 확실하게 원하는 게 있었다. 매디슨이 뭘 원한다고 이렇게 열렬하게 말하는 것을 듣다 보면 그걸 매디슨에게 주고 싶어진다. …나는 다시 매디슨을 사랑하고 매디슨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는 그걸 받아들이고 그걸 안고 사는, 우리 관계의 익숙한 패턴이 다시 시작되었다.”

셋째, 국내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40대 기혼 남성 작가가 썼다. 두 여성 주인공의 애증 가득한 ‘워맨스’(Womance)를 자락에 깔고 아이들을 세심히 보듬어 올리는 이야기를 말이다.

남자와 연애도 해본 적 없는 28살 여성이 졸지에 10살짜리 남매 쌍둥이의 엄마가 된다. 정확히는, 법정후견인.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맞다, 하류층을 진짜 하류에 가두는 건 가난 따위가 아니다. 한 치 앞도 흐리게 하는 하류부의 탁류 자체다. 내일의 선택, 더 먼 꿈이 존재할 수 있을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쌍둥이에게 ‘책임지고 싶다’ 약속이란 걸 하는 20대 여성의 이름은 릴리언 브레이커. 릴리언답지 않게 릴리언은 이제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한다.

1995년 미국 테네시, 고교 시절 단짝 매디슨이 편지를 보내온다. 1년에 너댓번 소식을 주고받는 릴리언의 유일한 친구. 매디슨은 테네시주 상원의원 재스퍼 로버트의 세번째 아내다. 남편이 국무장관 후보로 비공식 인사 검증을 받는 중이다. 유력한 정치가문의 적자로 장차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 걸림돌이 있다. 두번째 아내가 재스퍼로부터 버림받은 뒤 데려간 쌍둥이와 최근 그녀의 죽음. 진짜 걸림돌이 있다. 화가 나고 겁을 먹으면 화로처럼 안에서 불타오르는 아이들의 몸뚱이, 그리고 이들의 몸에 새겨진 엄마의 죽음은 알려진 것보다 아주, 아주 더 처참했다는 사실.

매디슨은 재스퍼를 사실상 재선시킨 선거전략가로서 쌍둥이를 릴리언에게 맡기기로 한다. 사고가 나서도, 바깥에 알려져서도 안 된다.

소설의 맛은 릴리언이 불 좀 다룰 줄 아는 이 기괴한 아이들과 처음 만나 말 그대로 한바탕 ‘데어 버린’ 소동에서, 서서히 비밀들을 나눠가며 신뢰를 쌓고, 무장 더 단단한 바람과 다짐을 해가는 과정에 있다. 겉으로만 보면, 아이들에게 “언제나” 곁에서 “괜찮아”라고 말하게 되는 절대 보호자의 경지를 시현한다. 하지만 도처 흔해빠진 사랑과 책임의 허위, 그 본질을 깨닫고 내면화하는 ‘어른’으로의 성장 여정에 실상 더 가까워 보인다. 말미에 이르러 릴리언이 가난과 자기비하밖에 물려준 게 없는 제 엄마와도 부족하나마 화해해가는 이유일 것이다.

아버지도 모르는 미혼모의 아이로, 엄마조차 “똥을 쥐고” 태어났다고 멸시해대던 릴리언에게 꿈이 없던 건 아니다. 동네 산골에 세워진 귀족, 부자들의 여자 기숙학교(아이언마운틴 고교)에, 말하자면 지역인재 할당제로 장학생 입학한 릴리언은 대학 진학해 진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바로 매디슨이었다. 재력과 미모에 키도 훤칠한데다 여느 고루한 부자 여고생들과 달리 매디슨은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솔직함”으로 권력을 지향하되 반항심 또한 컸다. 게다 둘은 유례없이 1학년으로 학교 대표팀에 선발될 만큼 농구 실력이 뛰어났다. 각기 가족으로부터 상처받았던 둘 사이 연애가 싹튼다.

동네 기대주 릴리언은 그러나 2학년도 되기 전 퇴학당한다. 코카인이 발각된 탓이다. 사실 매디슨의 것으로 그의 아버지가 릴리언 엄마를 돈으로 매수한 덕분이지만, 두 소녀들도 익히 내막을 알았다. 릴리언은 다들 “완전히 포기해버”린 유령이 되고, 스스로도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다.

15년 만의 두 여성의 만남은 그 질퍽한 워맨스 위에서 이뤄진다. 쌍둥이(베시와 롤런드)의 미래를 두고 둘은 거듭 반목하지만, 결국 아이들을 온전히 책임지려는 데서 또 화해한다. 재스퍼의 국무장관 취임식 동안 돌연 드러난바, 소설이 막판 꾀한 또 한 번의 반전이 계기다. 재스퍼와 매디슨 사이 태어난 또 다른 사내(티머시)도 ‘불의 아이’였던 것.

아이들이 숨겼다 때로 발산하는 화염은 이들의 부정할 수 없는 존재감과 어른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실질적 힘을 상징한다. 아름답고 강한 것에 부복하는 어른 세계에서, 스스로를 태워내는 불이야말로 공포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상징과 은유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므로, 불 못/안 보는 어른들에 상상으로 맞선 발칙한 리얼리즘 소설로 이 작품을 일러보겠다. 영화(‘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 2016)로도 제작됐던 ‘팽씨네 가족’(2011)을 썼던 영문학 교수 케빈 윌슨(45)의 최신작.

덤으로 이 소설을 보는 데 도움될 만한 주요 낱말의 의미를 소설 속에서 추려본다.

■ 남성(정치인) : “진짜 멍청한” “자기들이 한 삽질을 수습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냥 그렇게 뭉개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류.

■ 육아 : “‘끝없는 후회와 가끔 그 후회를 잊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음.

■ 부자 : “무슨 소리를 하든 자신감 있게 눈 깜짝 안 하고 말하면 사람들이 알아서 최선을 다해 믿어” 주는 대상.

이것이 어른의 세계다. 그럼에도 어린이들은 “전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마음을 열게 만드는 간절하고 여린 존재”라는 것. 릴리언이 쌍둥이와 대면 뒤 한 첫번째 결심은 “이 아이들은 불을 낸다. 나는 아이들이 불을 내지 않게 막아야 한다”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불타 있다. “나는 베시가 불을 내면 베시를 끌어당겨 안을 생각”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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