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방죽 위의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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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이 내리쬐는 시간을 피해 요즘은 어둑한 새벽에 방죽을 걷는다.
돌로 쌓은 방죽 옆으로 흐르는 개여울 물소리를 들으며 걸으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방죽 길을 끝까지 걷고 돌아오다보면 해님이 떠오른다.
요즘은 수세식 화장실이라 배변을 물로 깨끗하게 내려버리기 때문에 똥은 오로지 정화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지금도 드물게 자연농을 하는 이들 중에는 생태 측간을 만들어 똥을 잘 모았다가 농작물을 키우는 소중한 거름으로 사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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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이 내리쬐는 시간을 피해 요즘은 어둑한 새벽에 방죽을 걷는다. 돌로 쌓은 방죽 옆으로 흐르는 개여울 물소리를 들으며 걸으면 기분도 상쾌해진다. 주민이 적은 시골이라 걷는 이들이 거의 없어 호젓한 산책을 즐기는 셈이다.
방죽 길을 끝까지 걷고 돌아오다보면 해님이 떠오른다. 갈 때는 어스레한 미명이라 못 보았는데 햇살을 머금은 길 위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어, 이거 뭐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한 무더기 개똥에 웬 나비들이…. 아마도 산책하는 이가 데리고 나온 개가 싼 똥이 분명해 보이는데, 똥 무더기에는 나비 떼가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마침 나비 도감을 공부하던 중이라 개똥에 붙은 나비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홍점알락나비. 날개에는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가 있으며 날개 끝부분에 홍색 반점이 찍혀 있는 나비. 하여간 나비 대여섯마리가 똥 무더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실은 똥을 맛있게 시식 중이었던 것. 저마다 홍점들이 찍힌 비단날개를 펼친 채 ‘성찬(盛饌)’을 즐기고 있었다. 내 눈엔 나비들이 달라붙어 시식하는 개똥이 한 상 잘 차린 성찬으로 보였다. 드물게 보는 광경이라 호기심이 일어 한참을 지켜보다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물끄러미 이 광경을 내려다보는 구름 안경을 낀 대식가 해님도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날갯짓이 가볍고 고결해 보이는 나비가 더러운 똥을 먹는다고? 나비 중에 몇종은 나뭇잎의 즙도 빨아 먹지만 동물의 분비물도 즐겨 먹는다. 나비가 똥을 시식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릴 적 배변을 못 가리는 아이들이 방 안에서 똥을 싸면 어른들이 “워리! 워리!” 하며 개를 불러 방바닥의 똥을 깨끗이 핥아 먹도록 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시골에서 그런 경험을 하며 밥-똥-밥-똥의 순환 이치를 자연스레 익히며 자랐다. 요즘은 수세식 화장실이라 배변을 물로 깨끗하게 내려버리기 때문에 똥은 오로지 정화의 대상으로 여기지만, 지금도 드물게 자연농을 하는 이들 중에는 생태 측간을 만들어 똥을 잘 모았다가 농작물을 키우는 소중한 거름으로 사용하곤 한다.
똥 얘기를 좀더 하자면 지금은 농업박물관에나 있는 똥장군을 빼놓을 수 없다. 똥과 오줌으로 된 거름을 중요하게 여기던 전통 농경사회의 대표적 거름 운반 도구. 옛것을 좋아하는 나는 지금도 똥장군 한분을 모시고 있다.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분뇨가 중요했던 만큼 운반·저장할 때 사용하는 똥장군은 농부들에겐 필수적인 농기구였다.
어린 시절 나는 똥장군을 지게에 얹고 비지땀을 쏟으며 산밭으로 가시던 아버지를 따라 걷던 아련한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아버지가 산밭에서 따다 준 옥수수·감자, 밭고랑에서 자란 노란 개똥참외를 맛있게 먹으며 자연스레 똥이 밥으로 되는 것을 체득했다.
돈만 있으면 먹을 게 너무 흔해빠진 시절에 귀한 지면을 똥칠(!)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먹거리의 배후엔 분뇨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농을 꾸리는 나는 요즘도 요강을 사용하면서 식구들 오줌을 모아서 삭혔다가 밭에 넣고, 각종 음식물 찌꺼기를 거름으로 이용한다. 무슨 형이상학이니 형이하학이니 하는 거창한 철학은 몰라도 되지만, 밥-똥-밥-똥의 순환 철학은 기억하고 살면 좋겠다.
고진하 시인·야생초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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