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세에도 강단 서는 '영원한 학자'…후학들에 지혜와 용기를 전하다 [Weekend 헬스]

파이낸셜뉴스 2023. 8. 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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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박사' 박상철의 홀리 에이징 <25>조용기 우암학원장 '장수인의 삶'
농촌 살리기 위해 '인재양성' 다짐...유치원·대학교·시니어클럽까지 전연령·계층 아우르는 사학에 헌신
새벽3시에 일어나 일기쓰기로 하루 시작... 매일 교정 거닐며 주변의 자연과 대화
젊은세대 걱정하자 "우리보다 잘할 것"
조용기 우암학원장
98세에도 강단 서는 '영원한 학자'…후학들에 지혜와

아흔여덟이 넘은 분이 대학생들을 상대로 정규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침 서울대학교에서 함께 보직하였던 서범석 박사가 총장으로 있는 광주 남부대학교의 창립자 조용기 학원장(사진)이었기에 바로 연락이 되었다.

교정에 들어서자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라"라는 글이 큰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장수학자로서 조 학원장에 대해 궁금했던 점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의 형식과 내용이었다. 백살 가까운 나이에 가끔 강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정기적인 강좌를 운용하는 일은 여러모로 무리라고 생각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좌 제목은 '인간학'이었다. 동서고금의 역사적 인물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업적을 이룬 과정과 자신이 일제,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4·19, 5·16, 5·18 등의 격동기를 지내면서 직접 겪은 위기상황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했는가를 후학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는 강좌였다. 후학들이란 80년의 나이 차이가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격변기를 살아오면서 겪어낸 과정을 진솔하게 설명하면서 다가올 미래사회의 변화를 통찰해 슬기롭게 대처하도록 이끌어 주는 진정한 인성교육이었다. 백 살이 다된 분이 증손자 뻘의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나갈 지혜와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모습에서 거룩함을 느끼면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조 학원장이 가장 존경하는 분은 당신의 선친과 '덴마크 중흥의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니콜라스 구룬트비히다. 어린 시절 선친께서 어느 비 오는 날 낙숫물이 토방에 놓인 돌에 떨어지는 모습을 가리키면서 "저 봐라. 꾸준하게 하면 빗물이 돌을 뚫을 수 있듯이 열심히 노력하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가슴에 깊숙이 새기고 살았다. 그러한 각오로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 모두 극복해냈고, 자신의 호도 어리석은 바위라는 의미에서 '우암(愚岩)'으로 정했다.

조 학원장이 교육시스템 확립에 열정을 기울였던 근원적인 이유는 가장 존경하는 구룬트비히의 영향 때문이었다. 덴마크가 전쟁 패배로 대부분의 영토를 뺏기고 침몰하고 있을 때 등장한 그룬트비히는 교육자이자 종교인이었으며 정치인이기도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愛天 愛人 愛國)"는 삼애(三愛)의 구호를 내세우며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돌아가게 하는 농촌살리기운동을 추진했다. 계몽의 일환으로 농촌 지역에 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생활개선운동을 벌여 덴마크가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나라로 발전하는데 주춧돌을 놓아 덴마크를 중흥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룬트비히의 행로를 따라 조 학원장도 농촌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양성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해 고향인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 옥과고등학교를 세웠고 나아가서 실사구시를 목적으로 전문기술인력을 배출하기 위한 전남과학대학교를 설립했다. 이어서 보다 크게 봉사하겠다는 의지로 광주에 남부대학교를 설립해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유아원, 유치원, 시니어클럽 등 인간의 전 생애를 포괄하는 우암학원이라는 전방위적 메가교육체계를 농촌사회에 구축해, 외진 농촌 시골인 옥과라는 면 단위 농촌에서 어린이, 젊은이는 물론 나이든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꿈을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더욱이 노동자와 군인들을 위한 야간교육 과정도 개설해 학위를 수여하는 사회적 교육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고령사회로 변환한 농촌에 '시니어클럽'을 설립해 노인들이 자활적 삶을 살고 당당한 노인상을 갖추도록 유도한 선각자이기도 했다. 전인적 교육을 통해서 아름답고 행복한 지역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을 헌신한 셈이다.

대화 도중 뜻밖에도 조 학원장은 이미 전부터 나를 잘 알고 있었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나의 선친과 동갑으로 가까이 벗하며 지냈던 분임을 알게 되어 선친을 뵌 듯 더욱 반가웠다.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우리 사회의 희망은 오로지 청소년에 있다는데 공감해 보이스카웃, 적십자, YMCA, 산악회, 청소년문화 운동을 함께 추진했고 광주살리기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었다. 나는 오십 년 넘게 타관 생활을 해 온 탓으로 선친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고향 분들을 미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죄송한 마음이 가득하였다.

조 학원장은 타계하신 나의 선친과 달리 여전히 사회활동을 능동적으로 하고 있어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가까운 친구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려서 함께 벗할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요즘은 매일 교정을 거닐면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나 길 옆에 놓인 돌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60~70년 전 자신이 직접 심고 옮겨 놓은 것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보면은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했다.

조 학원장은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전날 이루어졌던 일들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일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십년 써왔다. 95세가 되었을 때 한해 동안 썼던 일기를 모아 '아침단상365: 살아온 길 95년'이라는 책을 내어 장수인의 생각과 삶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이어 한 시간 이상 산책하고 돌아와 목욕하고 아침 식사 후 출근하고 돌아와 저녁식사 후 다시 샤워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이고 능동적인 생활이었다. 바로 전형적인 장수인의 생활 패턴이었다.

대화 마무리에 변화하는 세태와 젊은이들의 별난 행동들이 미래사회에 미칠 우려에 대해 물었다. 조 학원장의 답은 의표를 찌르는 감동을 주었다. "무슨 걱정인가? 후학들은 우리들보다 더 잘할 것이네. 나는 그들을 믿네." 후학에 대한 신뢰가 이토록 단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친과 나를 잘 알고 있는 조 학원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 부친보다 자네가 더 잘하고 있지 않은가!" 비교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 이상 반론을 던질 수 없게 압도했다. 인류사회는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진화한다는 신념으로 교육자로서 후배들에 대한 믿음을 강하게 표현했다.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장수인의 초월적 생각에 감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손가락으로 바위도 뚫는 불굴의 정신과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후학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백 살이 넘더라도 강의를 지속하겠다는 강한 의지는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삶에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박상철 전남대 의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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