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개탈’이 대신 복수해주는 사회
‘사적 복수극’에도 열광
공감 넘어 ‘병적 집착’
약자 노리는 ‘불안 시장’
‘복수’ 그것도 ‘사적 복수’가 요즘처럼 문화적으로 대량 공급-대량 소비된 적은 없었다. 경찰서나 법원은 필요없다. 직접 찾아 처형하고, 묻어 버리고, 후련해진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가 아니라 “주먹이 있는데 왜 법을 쓰냐”는 식이다. 전 세계적으로 복수, ‘야만의 정의(Wild Justice)’를 다룬 창작물이 인기지만, ‘문화 강국’ 한국은 더 격렬하게 ‘복수 제품’을 찍어낸다.
택시 승객이 “복수해 달라” 주문하면 원수를 찾아 대신 복수해주는 내용의 드라마 ‘모범택시’, 학폭 피해 여고생이 20년을 준비한 끝에 가해자를 응징하는 ‘더 글로리’, 원수의 손주로 환생해 재벌에게 복수하는 ‘재벌집 막내아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최근 나온 드라마는 한 발 더 나갔다. “무죄의 악마를 처단하겠다”고 나선 일명 개탈(’개딸’이 아니다)이 ‘국민사형투표’ 문자를 보내 과반이 찬성하면 실제로 사형을 집행한다. 드라마 속 ‘개탈’은 인지수사를 하는 경찰이자, 공소장을 쓰는 검찰이고, 최종 판결을 내리는 대법관이며, 최후의 목줄을 거는 사형집행관이다. 국민에게 찬반을 물어 ‘살인’을 ‘사형’이라는 공적 행위로 만든다. ‘공공적 사적 복수’라는 개념을 들고나온 셈이다. ‘드라마가 사법 불신을 부추긴다’고 비판하면 “무법천지에서 픽션으로 대리 만족하는 것도 문제냐”고 반박한다.
무법천지라니. 2011년 살인 범죄는 1204건(살인 기수 427건, 살인 미수 777건)이었고, 2021년에는 658건(살인 기수 270건, 살인 미수 388건)으로 10년간 반으로 줄었다. 작년에는 689건, 올 상반기는 351건이었다. 정치 중독자들은 “윤석열 정부 들어 치안이 망가져서 그렇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풀려서 그렇다.
강력 범죄는 사회 활동의 부산물이다. 인간 사는 곳에 살인이 없는 곳은 없다. 그래도 강력 범죄가 확연한 감소 추세다. 사기, 절도는 범인 검거율이 60~70%지만, 살인(96%) 강간(94%)등 5대 강력 범죄 검거율은 90%를 넘는다. 그래도 이렇게 말한다. “거 봐라, 4%는 못 잡았다는 얘기다.” 범행을 미리 막지 못했다는 비난을 언론도 쉽게 한다.
‘한(恨)의 민족’이라는 말은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 ‘피해의 민족’이 들어섰다. 피해자 애도를 넘어 ‘나도 피해자’라고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간다. 피해의 민족이 복수극을 마다하면 이상한 일이다.
‘힐링 예능’ ‘먹방 예능’을 대체한 경향이 ‘범죄 예능’이다. 범죄가 어떻게 ‘예능’이 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건, 모든 범죄를 ‘스릴러’처럼 다루기 때문이다. 유튜브, 공중파, 케이블 가리지 않고 작법이 비슷하다. 무고한 피해자와 악랄한 포식자 구도에 결론은 ‘이 순결한 피해자처럼 당신도 당할 수 있다’. 아는 사건도 방송으로 보면 오싹하다. 영상의 주술이다.
“이건 피해자의 과오” “가해자는 상황은 이랬다” 같은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잘못했다는 거냐’ ‘가해자에게 서사를 부여한다’는 항의가 빗발치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한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을 일반 범죄까지 잘못 적용한 결과다. 사건을 부검해 ‘살아갈 교훈’을 얻는 대신 ‘공포의 포로’가 된다.
‘범죄 예능’은 공동체를 ‘가해자 예비군’으로 지목하면서 여성과 약자를 집으로 숨게 한다. 약자를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위축시키는 ‘나쁜 교육’이다. 덕분에 ‘불안 시장’은 날로 커져 보안, 호신용품을 넘어 ‘묻지 마 범죄 보험’까지 나왔다. ‘사적 복수극’은 그 불안 시장의 ‘호객꾼’이거나 ‘청소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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