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으로 잊힌 1세대 서양화가, 70년 만에 빛 봤다
“이 그림 속 어머니 품 안에서 자고 있는 어린아이가 바로 접니다.”
백발이 성성한 화가의 아들이 전시장에 걸린 그림을 가리켰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가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화면 오른쪽에 화가의 아내가 우두커니 앉아있고, 탁자에 팔을 괴고 생각에 잠긴 큰딸도 보인다. 아내의 배 속에는 곧 태어날 막내딸도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떠난 후 서울 명륜동 집을 팔고 이사 나올 때까지 마루 이젤 위에 놓여 있던 그림”이라고 했다.
서양화가 임군홍(1912~1979)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신사동 예화랑에서 둘째 아들 임덕진(75)씨가 김방은 예화랑 대표와 만났다. 임군홍은 김환기, 이중섭과 시대를 공유한 1세대 서양화가이지만 1950년 월북(또는 납북)해 국내에서 잊힌 작가였다. 김 대표는 “빛의 섬세한 변화, 그날의 공기와 바람까지 느껴질 정도로 세밀한 분위기를 화폭에 구현한 화가”라며 “무엇보다 작품을 이렇게 잘 보관해 온 유족들에게 깊은 존경심이 일었다. 그림을 통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아들의 이야기를 많은 분과 나누고 싶어 전시를 준비했다”고 했다.
시작은 본지 주말판 ‘아무튼, 주말’ 기사였다. 지난해 12월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연재물에 소개된 임군홍 스토리를 읽고 김 대표는 ‘혹시 외할아버지와 친분이 있지 않았을까’ 직감했다고 한다. 김 대표의 외할아버지는 1954년 예화랑 전신인 천일화랑을 창립한 이완석(1915~1969). “두 분 다 살던 집이 명륜동이었고, 임군홍이 일제강점기 중국과 서울에서 광고 회사를 했다는 이력도 1세대 산업디자이너인 외할아버지 삶과 비슷해서 두 분이 교류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김 대표는 필자인 김인혜 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에게 전화를 했고, 임군홍의 둘째 아들인 임씨와 연락이 닿았다. 아들의 첫 마디가 “아, 완석이 아저씨!”였다. 임씨는 “아버지가 북한으로 간 뒤에도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용돈을 주시고, 어머니 가게도 자주 찾아 살펴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임씨는 “아버지 그림을 이렇게 보여드리기까지 긴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며 “저희 집안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림 잘 간수해서 나중에 세상 사람들에게 꺼내 보여주라’는 어머니 유언을 이제야 받들게 됐다”고 했다.
전시는 1930~50년대 임군홍 작품 117점을 갤러리 1~3층에 꽉 채웠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미완성작 ‘가족’을 비롯해 1980년대에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소녀상’ ‘여인좌상’ 등 5점도 포함됐다. ‘소녀상’(1937)은 몇 번의 붓질로 인물의 형태를 표현해 내는 기법이 뛰어나고, ‘모델’(1946)은 과감한 화면 구성과 색채 선택이 마티스 못지않은 대담성을 보인다.
임군홍은 생계를 위해 광고·디자인·인쇄 사업을 하는 한편 꾸준히 유화 작품을 발표해 서울, 베이징, 톈진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중국 우한에 정착해 사업을 하는 동시에 틈틈이 중국의 일상과 풍경을 그렸다. 광복 후 서울에 와서 디자인 회사를 차린 그는 1947년 달력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 사진을 사용했다가 6개월 가까이 수감됐고, 출소 후 특별사면을 받았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을 두고 홀로 북으로 떠났다.
북한에 간 임군홍은 조선미술가동맹 개성시 지부장을 지내며 1961년까지는 어느 정도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주체사상이 고조되던 1962년 현역 미술가로 강등돼 하방 조치됐고, 조선화 제작으로 전향했다가 1979년 작고했다. 미술사가 김인혜씨는 “임군홍은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대상을 대면한 순간 느낀 정감을 자유자재의 기법으로 구현해 낼 수 있었던 화가”라며 “성공한 디자이너로서 임군홍이 가진 유연하고 도전적인 태도가 회화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9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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