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반대를 위한 반대… ‘비토크라시’에 빠진 정치
검찰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쌍방울 대북 송금 의혹과 관련해 제3자 뇌물 혐의 피의자로 전환하고 소환을 통보했다. 김성태 전 쌍방울 그룹 회장과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다. 검찰은 소환 조사 후 백현동 특혜 의혹과 묶어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고된(?) 수순이다.
체포 동의안을 청구하면 이번에는 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대표 스스로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김은경 혁신위’도 불체포특권 포기와 체포 동의안 가결 당론을 요구한 터라 부결할 명분이 약하다. ‘친명’은 여전히 ‘정당한’ 영장이 아니니 부결이 옳다고 주장하겠지만 갈수록 수세에 몰리는 형국이다. 당대표를 향한 영장 청구를 ‘비회기’ 중에 해달라는 요구가 군색한 민주당의 처지를 보여준다.
박광온 민주당 원내대표는 “대선 이후 1년 반 동안 대선 경쟁 후보에 대해 전방위로 진행된 수사를 이제는 끝낼 때”라며 “민주당은 이 대표를 위한 방탄 국회를 소집하지 않고, 체포동의안이 오면 부결 당론을 정하지 않을 것이며, 비회기 중 영장이 청구되면 영장실질심사를 당당하게 받는다는 세 가지 원칙을 밝혔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끝낼 때’라는 대목에서 이 대표 사법 리스크에 대한 피로감과 체념이 묻어났다.
예상대로 체포 동의안이 가결되면 남은 변수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영장 ‘발부’ 혹은 ‘기각’ 여부다. ‘초현실적’ 드라마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다. 2019년 윤석열 검찰총장의 검찰이 조국 법무부 장관 압수 수색을 한 데 대해 당시 집권 세력의 주축인 ‘586′이 ‘검찰 쿠데타’로 규정한 이래 ‘초현실적 드라마’는 ‘시즌4′를 맞고 있다. 이젠 끝낼 때가 됐다. 더 가면 ‘심리적 내전’이 아니라 폭력적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
정치는 전쟁과 스포츠 중간 어디쯤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가까이 가면 상대를 ‘적’으로 보고 스포츠로 가까이 가면 상대를 ‘경쟁자’로 본다. ‘쿠데타’와 ‘혁명’을 동시에 폐기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가 가능한 ‘1987 체제’로 이행한 이후 36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상대를 ‘이길’ 경쟁자가 아니라 ‘죽일’ 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 정치의 본질이 세계관이 다른 두 세력의 ‘주류 교체 전쟁’이기 때문이다.
국제 정치든 국내 정치든 조폭이든 위계 질서가 분명하면 평화는 유지된다. 위계가 깨질 때가 문제다. 그레이엄 앨리슨은 ‘예정된 전쟁’에서 신흥 세력이 지배 세력을 위협할 때 가장 치닫기 쉬운 결과가 전쟁이라고 통찰했다. 그는 이를 ‘투키디데스 함정’이라 불렀다. ‘미·중 패권 전쟁’이나 ‘주류 교체 전쟁’ 모두 세계관의 충돌이란 점에서 본질적으로 ‘전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중국이 덩샤오핑의 ‘도광양회’ 유훈을 잊고 ‘전랑 외교’로 발톱을 드러낸 것은 좋은 전략이었을까. 크리스 밀러는 ‘칩 워(chip war)’에서 ‘중국 제조 2025′에서 드러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전략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반도체 패권 전쟁을 생생하게 다뤘다. 중국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이 전쟁은 미국이 ‘No1′을 넘보던 일본을 주저앉힌 1985년 ‘플라자 합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경제 전쟁’이 아니라 ‘안보 전쟁’이기 때문이다.
민주당도 중국과 비슷한 처지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이 탄핵에 찬성한 국회의원 234명과 손을 잡고 ‘개혁 연대’로 발전시켜 개헌을 통한 ‘2017 체제’를 만들었다면 민주당은 ‘주류 교체 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고 대한민국의 주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탄핵 주체’를 좁히는 전략적 패착으로 다시 안 올 역사적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 보냈다.
문재인 정부 5년은 주류가 된 민주당이 여전히 비주류인 양 조급하고 거칠게 몰아붙이다 민심을 잃고 비주류 위치로 되돌아간 시간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겨우(?) ‘4대 개혁 입법’(국가보안법·과거사법·언론법·사학법)을 밀어붙이다 정권을 잃었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1987년 이후 민주당에서 구상했던 외교·안보·산업·경제·노동·재정·복지·부동산·조세·언론·사법·국정원·검찰·공수처·수사권 조정·선거제도 등 해보고 싶었던 정책과 제도를 겁 없이 모두 실험(?)해 본 끝에 민심을 잃고 정권을 잃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온갖 곳에 ‘개혁’이란 딱지를 붙였다. ‘검찰 개혁’ ‘사법 개혁’ ’국정원 개혁’ ‘언론 개혁’ ’국방 개혁’ ‘경찰 개혁’ 등등. ‘개혁’은 곧 ‘장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민주적 방식’이 아닌 ‘혁명적 방식’, ‘정치적 방식’이 아닌 ‘전쟁 방식’을 택했다. ‘적폐 청산’은 혁명의 슬로건, 전쟁의 구호였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게 세상 이치다. ‘검찰 쿠데타’를 진압하지 못했으니 문재인 정부 5년의 모든 시도도 ‘반국가 세력’의 ‘쿠데타’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적폐가 ‘청산’ 대상이듯 반국가 세력도 ‘척결’ 대상이다. 결국 윤석열 정부의 ‘비정상의 정상화’도 문재인 정부의 개혁처럼 ‘장악’의 다른 버전이다.
전쟁 같은 정치를 이젠 끝낼 때가 됐다. 정치는 ①국가의 방향을 결정하고 ②국민을 통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기능이 모두 작동불능 상태다. 국민은 분열되어 있고, 정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에 빠져 있다. 국익이나 공익보다 당파적 이익과 사익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뻔뻔하게 먼저 챙기는 정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애국심, 공적 의식, 책임감, 품격, 정직, 공동체 의식, 용기는커녕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다. ‘통찰’도 없고 ‘성찰’도 없고 그저 ‘현찰’(돈과 자리)만 탐할 뿐이다.
‘주류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내년 총선이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 동의안이 국회로 넘어가는 순간 전쟁은 시작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치명적 위험을 안고 있다. 민주당은 영장이 발부될 경우 자칫 당이 분열할 수도 있다. 분열하지 않더라도 지지층 일부가 투표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힘은 ‘이재명 없는 민주당’, 즉 ‘비대위’로 연착륙할 가능성에 대한 준비가 없어 보인다. 양당 모두 내부에서 ‘위기’ 경보가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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