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잘 들리고, 가장 잘 보이는 낮은 자리의 미학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는 가끔 눈앞이 환해지는, 또는 머리가 맑아지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씀'을 만날 때가 있다.
가족 친구 지인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튀어나온 한 마디에서 순간적으로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는 가끔 눈앞이 환해지는, 또는 머리가 맑아지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말씀’을 만날 때가 있다. 가족 친구 지인 가까운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튀어나온 한 마디에서 순간적으로 그런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속 깊은 사람이구나” 하며 속으로 새삼스레 감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니, 정말 내 생각이 맞는 걸까” 하며 자신에게 놀라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안에는 현실의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존재들이 들려주는 소리를 가장 잘 듣는 사람은 아마 시인일 것이다.
박화남 시집 ‘맨발에게’를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좋은 친구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하고 들어주기도 하고, 함께 눈물 흘리다가 어깨를 감싸주기도 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도 하는 그런 느낌이다. 시집에 수록된 현대시조마다 짧은 시 한 편이 주는 감동이 솟아난다.
‘가죽 장갑’을 읽어보자. “아버지는 없는데 낡은 손만 남아서/ 마디가 굽은 채로/ 창고에 걸려있다// 그 겨울 마지막 지문/ 희미하게 묻어있는// 껍질이 벗겨져서 더 시린 손가락들/ 이제야 마주 잡고/ 내 손을 끼워본다// 함부로 버릴 수 없는/ 두 손이 나를 잡는다//” 고인이 된 아버지를 떠올리는 독자라면 누구나 눈물이 고일 것이다.
‘아무렴, 계란’은 오래된 지혜를 되새겨 준다. “너무 많이 조심하면 오히려 놓칠 수 있다/ 어쩌다 떨어뜨렸을 때 나도 같이 떨어졌다// 괜찮다, 깨지는 게 삶이지/ 얼러주는 할머니// 생각하니 깨진 것은 계란만이 아니었다/ 오늘이 얇아져서 내일을 파먹듯이// 짙푸른 한 겹의 상처/ 지워지지 않았다// 꽉 쥐면 빠져나간다 잡는 듯 놔줘야지/그때마다 할머니는 아픈 곳을 궁굴렸다// 그 자리 붙여놓으면/흉터도 꽃이라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할머니 어머니가 일상생활 속에서 무심하게 들려주던 말들이 박화남 시조 안에 있다.
시집 해설을 쓴 손진은 문학평론가는 박화남의 시조를 ‘삶의 구체성과 눈부신 이미지, 그리고 낮은 자리의 미학’이라고 표현했다. 시집을 읽고 나면 ‘낮은 자리의 미학’이라는 말이 더 잘 이해된다. 낮은 자리에 앉아 사람과 세상 만물을 오래,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낮기에 가장 잘 들리고, 가장 잘 보일 것이다. 그 옆이 독자의 자리이다.
박화남 시인은 김천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5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 시집 ‘황제펭귄’에 이어 ‘맨발에게’를 출간했다. 2022년 천강문학상 시조부문 우수상, 중앙일보 중앙시조신인상을 수상했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