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30대 여기자의 이발 체험기
처음부터 그에게 내 머리칼을 맡길 생각은 아니었다. 95년 동안 3대(代)를 이어온 서울 공덕동의 성우이용원, 이남열(74) 이발사를 처음 취재하러 간 7월 어느 날이었다. 화요일 오전이 가장 한갓지다고 해서 때맞춰 찾아갔는데도 벌써 머리를 깎는 이와 깎이는 이, 차례 기다리는 이가 도란도란하고 있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가 본 이발소는 눈길 닿는 것마다 신기한 곳이었다. ‘이발’이 아니라 ‘조발’이라고 쓴 가격표, 용도를 알 수 없는 가죽끈, 주둥이가 500원짜리 동전 크기로 동그랗게 뚫린 드라이기….
미용실에서 온갖 희한하게 생긴 파마 기계도 봐 왔건만, 가위를 번갈아 꺼내 들며 뒷머리, 윗머리, 구레나룻을 조각하듯 깎아내는 그의 이발은 진기한 묘기 같았다. 이윽고 이 나간 빗과 드라이기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히마리’ 없던 머리가 보송보송 풍성해지는 광경에 이르자, 뭐에 홀린 듯 말이 튀어나왔다.
“혹시 여자 머리도 자르시나요?”
“그럼, 단골 여자 손님이 일곱이나 된다고.”
천을 두르고 거울 앞에 얼굴만 내놓고 앉았다. 사람이 가장 못생겨 보인다는 그 자리. 거울 속 내 모습에 돌연 걱정이 들어 “너무 짧게는 말고 끝만 살짝 다듬어주세요” 하고 소심하게 당부했지만 내심 어떤 ‘연장’을 쓸지 궁금했다. 그가 꺼내 든 건 면도칼. 이번엔 의심이 들이쳤다. 아까 그 아저씨 짧은 머리에는 그토록 현란한 가위질을 하시더니? 혹시 내 머리에다 실험을 하는 건 아닐까.
숱한 남정네 구레나룻과 인중을 거쳤을 면도칼이 내 머리 끝을 지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한참을 집중하며 머리카락을 긁어내던 그의 얼굴에 종국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이거 봐. 칼 댄 티가 하나도 안 나지? 자연스럽지?” 푸석하고 갈라졌던 머리 끝이 정말 차분하고 부드럽게 찰랑였다. 겸연쩍어 헛웃음이 났다.
오후에는 뒷머리와 수염을 산적처럼 기른 남자가 들어왔다. 베테랑 이발사는 ‘이것만 있으면 터키 사람이 와도 걱정이 없다’며 내게 자랑했던 오래된 독일제 면도칼을 꺼냈다. 다시 사각사각, 조각이 시작됐다.
장사 수완이 좋은 편은 아닌 듯했다. 이쯤 하면 끝내도 될 것 같을 때 꼭 머리에 하얀 전분을 발라 어긋난 가닥이 있는지 살핀다. 기다리던 손님이 나가는데 붙잡지도 않는다. “손 떨리기 시작하면 끝”이라며 술·담배와 고기는 오래전 끊었다. ‘워라밸’이 시대정신이자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가 최고 덕담인 시대, 누군가의 눈에는 일에 ‘과몰입’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이발사는 이발에 관해 말할 때 거침이 없었다. “이발은 남자의 품격을 지키는 일이다. 서둘러선 그르친다.” 이발을 대단히 대단한 일이라고 여겨본 적 없었는데, 그의 정의(定義)를 듣고 나니 퍽 멋지게 보였다. 자기 일을 정의 내릴 수 있다는 건 일에 철학이 있다는 뜻이다.
어느덧 말쑥해진 털보 사내는 값을 치르고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꼭 한번 와보고 싶었습니다. 매번 줄이 길어서….” 이발이 아니라 꼭 인생 한 수 배우러 온 모양새였다. 만리재 골목에는 아직 방망이, 아니 머리 깎는 노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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