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지난 40년 봉직했던 조직 사회가 생각난다. 퇴직 동료들 모임에 나가면 옛 이야기를 하게 되고 과거의 일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내 역할은 끝났다. 내 의자는 후임자에게 물려줬고, 그들이 또 열심히 조직을 이끌어 나갈 것이다. 사회 제도는 그렇게 이어져 가고 그러면서 연계되고 통합을 이뤄간다.
퇴직하면서 나는 그동안 봐왔던 전공서적을 모두 버렸다. 새로운 공부를 하고 싶어서다. 그동안 가르치는 일만 해왔으니 이제는 내가 배우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선배들이 퇴직하면 정말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자신들을 위로하는 말로 들었다. 그러나 내가 퇴직하고 보니 정말 좋다. 우선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로 서두를 필요가 없어 좋고 하루 200쪽 이상 읽어야 했던 공문을 보지 않아 좋다.
오래전 일이다. 내가 새 자동차를 사서 몰고 출근했더니 옆에 앉은 동료가 자동차를 얼마 주고 샀느냐고 물었다. 그때 내 대답은 놀랍게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물어본 사람도 놀랐다. 아니 어제 산 자동차를 얼마 주고 샀는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나보고 이상하다고 했다. 나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사기 전에는 어느 회사 어떤 모델을 살까? 연비는 어떻게 되나? 이런 것을 모두 따져봤다. 그런데 값을 치른 다음에는 모두 잊었다. 나 스스로 비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채근담이 떠올랐다.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면 숲은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 위를 날아가도 기러기가 가고 나면 연못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을 드러내고 일이 끝나면 마음을 비운다’.
금년도 벌써 반이 지났다. 8개월 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평생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서 시간을 쓰고 있다. 농사도 짓고 먹고 남아 지인들에게 감자, 가지, 옥수수를 나눠 줬으며 맥주병이 수영장에 등록해 접영까지 배웠고 피아노도 배우고 있다.
오늘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보니 3천명 가까이 된다. 지난 1년 동안 한 번 이상 통화한 사람이 10%나 될까? 바람이 성긴 대숲에 불어와도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숲은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새로운 인생을 살면서 이제는 날아간 기러기처럼 그림자를 버리려 한다. 새로 공부할 것이 정말 많다. 오늘 2천명 넘게 연락처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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