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디레버리징, 경제적 자유와 성장의 출발

2023. 8. 2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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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부진이나 위기 본격화 前
자발적·선제적 부채 축소 중요
빚 짓눌려선 최적 의사결정 못해
비핵심 자산 팔아 투자재원 마련
준비된 기업만이 성장 기회 확보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부채 비율을 줄이는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이 극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것은 외환위기 직후다. 1998년 금융당국은 다음 연도 말까지 대기업그룹 부채 비율을 200% 이내로 낮추라는 지침을 밝히고 기업을 압박한다. 현재 기업 부채 비율이 100% 내외임을 고려하면 당시 200%는 높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회사가 수백%, 심지어 1000% 넘는 부채 비율을 보였던 당시엔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힘들 정도로 자금 사정이 어려웠다. 실제로 많은 회사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최근 대형 부동산개발업체 비구이위안의 채무불이행 위기로 중국 경제가 흔들리고 우리 역시 그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어서 채무 위험을 줄이기 위한 디레버리징 이슈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부채가 기업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이론인 ‘모딜리아니-밀러(Modigliani-Miller) 정리’에 따르면, 기업가치는 회사가 벌어들이는 미래 현금흐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부채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이론적 입장은 재무적인 어려움에 빠진 비용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고, 현실에서는 회사가 원리금상의 어려움으로 기업가치 훼손을 경험하는 것이 흔하다. 즉, 재무적인 어려움이나 부실 상황에서 ‘모딜리아니-밀러 정리’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따라서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시장 이자율이 폭등하며 재무적인 어려움이 발생하기 쉬운 대표적인 거시경제 여건이던 1997년 외환·금융위기 당시에 정책당국이 부채를 줄이려고 디레버리징을 추진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디레버리징 시점이다. 경제에 위기가 닥쳤는데 부채를 줄이는 작업을 강하게 하면 위기가 오히려 확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자본 대비 부채 비율을 낮추려면 채무를 갚아 부채 규모를 줄이거나 자기자본을 늘려야 하는데, 대개 위기 상황에서 채무를 갚을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할 수익을 올리기 힘들다. 또 이런 여건에서는 자본시장에서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증자(增資)에 성공하기도 어렵다.

결국 가능한 방법은 자산 매각을 통한 자금 조달이다. 물론 적절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산 매각은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거의 모든 기업이 같은 입장이어서 매각하려는 자산의 가치가 낮아질 가능성이 크고, 이런 매각 압력이 시장 전반에 있으면 자산 및 기업의 가치가 전반적으로 떨어져 위기가 악화할 수 있다.

따라서 특히 개별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경기 부진이나 위기 본격화 전에 선제적인 디레버리징이 중요하다. 이렇게 선제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디레버리징은 비핵심·저수익 자산 매각 과정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새로운 성장을 위한 투자 재원을 확보할 수 있기도 하다. 이렇게 준비된 기업은 다가오는 위기에서 오히려 새로운 성장 기회를 확보하는 경제적인 자유를 부여받는다.

자기자본과 달리 부채는 계속해서 원리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특히 금리가 상승하거나 상승한 금리가 유지될 상황에서 경기 부진으로 원리금 상환을 위한 자금 확보에 실패하면 미래 수익성이 높은 기업도 당장의 유동성 부담으로 ‘흑자도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1997년 위기가 아니어도 디레버리징이 충분하지 않은 기업이 경기 부진을 맞아 유동성 위기에 휘말린 경우는 수없이 많다. 어떤 경제주체든지 원리금 상환 부담에 시달리며 부채에 짓눌린 상태에선 최적의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물론 민간기업의 디레버리징은 상당히 진행돼 100% 내외 부채 규모를 고려하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평균적으로는 그렇지만 실적 악화와 함께 부채 부담이 커진 기업이 상당수 존재한다. 또한 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정부의 암묵적 보증이 있다고 간주하는 공기업 채무는 작년 말 250% 내외에 육박할 정도로 심각하다.

즉, 경제 전반에 디레버리징의 필요성이 부각되거나 이를 위한 정책이 시행돼도 놀랍지 않다. 그렇다고 가계부채나 공기업의 디레버리징을 급하게 추진해 경제에 충격을 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부채를 계속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서는 곤란하며 경제 전반에 점진적이고 거시적인 디레버리징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대응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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