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진의 초당문중과 강릉] 8. 허균이 420년 전에 보고 처음 기록한 강릉단오제

허경진 2023. 8. 2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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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수는 양(陽)이어서 생기가 많기에, 우리 조상들은 홀수가 겹친 설날(1월), 삼짇날(3월), 단오날(5월) 칠석(7월), 중양절(9월)을 명절로 여겼다.

"계묘년(1603) 여름에 나는 명주(강릉)에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 대관령신을 맞이한다기에 그 연유를 아전에게 물으니, 아전이 이렇게 말했다. '대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이 햇빛을 무색케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 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러운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와 향화를 갖추어 대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 부사(溟州府司)에 모십니다. 닷새 되는 날, 여러 가지 놀이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蓋]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날 가서 단오제를 직접 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었다.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고, 죽어서는 수천 년 되도록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고향 강릉을 사랑하고 보는 것마다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허균 덕분에 사백년 전 강릉단오제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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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강릉 단오 체험기, 400년 전 허균이 썼다
허균 ‘대령산신찬 병서’ 단오 기록
1603년 현장 찾아 구체적 서술
‘대관령신’ 신라 김유신으로 묘사
“고을 사람들 모두 좋아한 경사”
▲ 2023년 강릉단오제도 지난 6월 20일 신목을 앞세운 영신행차로 시작됐다.

홀수는 양(陽)이어서 생기가 많기에, 우리 조상들은 홀수가 겹친 설날(1월), 삼짇날(3월), 단오날(5월) 칠석(7월), 중양절(9월)을 명절로 여겼다. 단오는 동양의 여러 나라가 각기 다른 유래를 지니고 명절로 전승되었는데, 이 가운데 강릉 단오제가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국에서는 단오(端午)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항의하였지만, 충신 굴원(屈原)의 죽음에서 유래된 중국의 단오와 강릉 단오제는 출발부터가 아주 다르다.

‘삼국유사’ 마한편에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국(穢國)이다” 하였고, ‘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에 “(예국에서는) 늘 시월절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니, 이것을 무천(舞天)이라고 한다. 또, 범에게 제사지내어 신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10월 무천이 추수감사제라면 5월 단오제는 곡물의 성장을 비는 축제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단오를 세속에서는 수리[車衣]라고 한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단오도 추석(한가위)와 마찬가지로 그 유래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고려가요 ‘동동’에 “오월 오일 수릿날 아침에 먹는 약은 천년을 장수하실 약이기에 바칩니다”라고 했으니, 고려시대에는 단오날 아침에 약을 먹으며 장수를 빌기도 했다.

허균이 420년 전에 강릉단오제를 직접 보고 ‘대령산신찬(大嶺山神贊) 병서(幷序)’를 기록하였는데, 구체적인 최초의 기록이다.

“계묘년(1603) 여름에 나는 명주(강릉)에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 대관령신을 맞이한다기에 그 연유를 아전에게 물으니, 아전이 이렇게 말했다.

‘대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이 햇빛을 무색케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 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러운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와 향화를 갖추어 대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 부사(溟州府司)에 모십니다. 닷새 되는 날, 여러 가지 놀이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蓋]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風災)나 한재(旱災)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그날 가서 단오제를 직접 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었다.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고, 죽어서는 수천 년 되도록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고향 강릉을 사랑하고 보는 것마다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허균 덕분에 사백년 전 강릉단오제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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