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과학 독주의 시대, 잿더미 된 공론장 회복해야”
‘공공지식인’ 실종의 원인 분석
이념분쟁에 ‘존경의 철회’ 고착
“대학·언론·종교 역할 쑥대밭
권리 투쟁 속 ‘책무’ 사라져
진흙탕 싸움 승리는 무의미”
공공지식인은 어디에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 실종됐다. 합리적 토론은 자취를 감췄고, 이데올로기 투쟁만이 사회 전반을 휩쓴다. 기후위기, 글로벌 시장의 가속화와 더불어 오픈AI와 챗GPT의 출현은 지축을 흔든다. 이념 분쟁은 21세기 문명이 몰고 오는 충격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슬프지만 반드시 들춰내야 하는 현실이다.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도헌학술원 원장)는 치열한 논리의 끈을 붙잡고 한국 사회 현주소를 다뤄왔다. 그의 칼럼은 공론장에 개입하는 사회적 참여이자 담론이다. 사회학자로서 풍부하고 날카로운 필력으로 지난 30여 년간 500여 편에 달하는 칼럼을 쓰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다. 논리의 온상에서 꽃피는 문학성과 냉소적인 유머감각은 그의 글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다.
하지만 송호근 교수는 갈수록 글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자괴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고 고백한다. 유사한 형태의 정보와 논리의 홍수는 대중 편향성 심화를 부추겼고, “온갖 유형의 변사”들이 진을 쳤다. 공론장은 이미 잿더미가 됐다. 인민재판과 같은 ‘좌표 찍기’ 현장에서는 ‘토착왜구’, ‘죽창가’와 같은 섬뜩한 말이 튀어나온다. 송 교수는 “논리와 지식 생산의 민주화가 공공지식인의 퇴조를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그가 최근 펴낸 학술서 ‘21세기 한국 지성의 몰락’은 지식인 실종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데올로기가 과학 독주의 시대에 자리를 내줬음에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기술의 발전은 이미 종교화되었고, 인문학의 추락으로 통제를 벗어났다.
한림대 도헌학술총서로 발간된 이번 책은 1부 ‘막 오른 문명 대변혁’, 2부 ‘대학의 사회생태학’, 3부 ‘지성의 몰락’으로 구성됐다. 책의 부제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날지 않는다’다. 이미 이데올로기의 황혼이 다가왔지만, 지혜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부엉이’는 날개를 펴지 못하고 밖을 쳐다보고만 있다.
최근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송호근 교수는 “시민사회는 없고 정치사회만 남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좌우 진흙탕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결코 이기는 것이 아니다. 문명 대변혁의 질주를 고민하면 과거의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 ‘친북-친미’, ‘성장-분배’로 대표되는 두 개의 단층선에 둘러싸여 격돌하는 상황은 오늘날까지 지속된다. 일제 폭력에 짓밟힌 국가들의 반일전선과 중국·러시아·북한을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군사적 대치선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다.
대학, 언론, 종교는 공공지식인을 배양하고 사회 활동을 격려하는 임무를 담당하지만 세 영역 모두 쑥대밭이 됐다. 사회적 울림을 전하는 종교 지도자가 드물고, 이념에 따라 언론 지형이 나뉜다. 대학은 사회의 리더가 아니라 추종자로 전락했다.
교수들은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가 되지 못하고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도 2000년대 초반까지 공론장은 지식인의 목소리가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학평가’라는 그늘에 휘말려 전문학술지로 빨려 들어갔다. 대학은 전문가 양성소로, 교수들은 논문제조기로 전락해 은둔했다. 학문은 더 쪼개지고 미세화돼 시대진단에 닿지 않는다.
넓고 깊은 시야로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의 큰 흐름을 읽어내는 부분들이 눈에 띈다. 송 교수는 1960∼70년대를 ‘문사철’, 1980년대를 ‘사회과학’, 1990년대를 ‘분화’, 2000년대 이후를 ‘전문화’의 시대로 분류한다. ‘창비’와 ‘문지’ 두 개의 종합계간지가 논쟁과 담론을 쏟아냈지만 1980년대의 역사적 비극 앞에서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586세대 정치권은 시민운동 단체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여 이념분쟁을 고착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존경의 철회’가 일어났고, 지식인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독자들이 유튜브와 SNS로 몰리며 ‘지성의 몰락’이 일어난 것이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송 교수는 이제 ‘문명 대전환’을 화두로 삼아 “사회의 숨을 불어넣는 지식인의 역할을 다시 찾아야 한다”고 성토한다. ‘친구와 원수 간의 협동’을 통한 민주적 공론장의 회복이 바로 본질이라는 것이다.
송호근 교수는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그 길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사회적으로 객관적인 조건들을 바꿔줘야 하는데 지금은 방법이 잘 안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가 성공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손해를 너무 많이 봤다는 감각 때문인지, 권리 투쟁에 휩쓸려 책무를 말하는 목소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칼럼니스트 송호근을 놓고 ‘우파인가 좌파인가’를 묻는 말이야말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는 행위와 같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가치 판단의 이정표는 정해졌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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