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깊은 내설악 품 안에선 고요함이 요동친다

진교원 2023. 8. 2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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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부속 오세암 자장율사 창건
금오신화 저자·생육신 김시습 머물고
한용운 대표작 님의침묵 탈고한 곳
험한 산세 방문하기 힘든 사찰 중 하나
수선도량·기도도량으로 손꼽히는 곳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중 일부 (1926)
 

▲ 오세암 풍경

■ 오세암(五歲庵)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에 속하는 백담사(百潭寺)의 부속 암자로서 643년(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지었다.

당시에는 관음암(觀音庵)이라 불렀다. 1548년(명종 3)에 보우가 중건한 후, 1643년(인조 21)에 설정이 또 중건하면서 현재의 명칭이 붙었다. 오세암의 명칭 유래로는 그 유명한 관음영험설화와 김시습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월동 준비 관계로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떠나게 됐고, 네 살짜리 조카에게 “혼자 있는 것이 무섭거든 관세음보살님의 이름을 외우며 지내거라”고 일러주고는 길을 떠났다. 스님은 엄청난 폭설로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고, 봄이 돼서 눈이 녹은 뒤에야 암자로 올라갔다. 죽은 줄만 알았던 조카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했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작가이자,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 전기 학자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1493)과 관련이 있다. 김시습은 ‘오세(五歲) 신동’으로 불렸다. 세종의 손자 단종(端宗)이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사건이 일어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했다. 오세암은 김시습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다. ‘오세 신동’이라는 그의 별칭 때문에 ‘오세암’이라는 설이 있다.

오세암은 예전에는 산세가 하도 험해서 좀처럼 가기 힘든 사찰 중에 하나였다.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도착해 백담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백담사까지 올라간다. 내설악의 들머리 백담사를 거쳐 영시암까지 3.5㎞를 지나면 길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오세암을 경유해 봉정암~대청봉 정상으로, 또 하나는 수렴동 대피소~봉정암~대청봉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 두 길은 봉정암에서 합류한다.

▲ 오세암 천지관음보전

■ 내설악 만경대

오세암에 도착하기전에 꼭 봐야 할 곳이 있다. 내설악 만경대. 설악산에는 만경대라 부르는 곳이 3곳이 있다. 오세암 인근의 내설악 만경대, 양폭산장 위쪽에 외설악 만경대, 오색근처의 남설악 만경대. 설악의 만경대 3곳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내설악 만경대는 해발 922m의 암봉, 오세암이 보이는 정상에서 가파른 구간을 10분쯤 오르면 닿는다. 만경대 바위에 서면 왼쪽으로는 오세암이, 오른쪽으로는 가야동 계곡의 관문인 천황문이 보인다. 시야속으로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을 비롯해 대청봉 일대까지 들어온다.

오세암에서는 불자, 등산객 가리지 않고 밥을 내주고 재워준다. 오세암에서는 보통 된장을 풀어 끓인 미역국에다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내주는데, 그 맛이 천하일미라고 할 수 있다. 오세암 샘물은 설악산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다. 고즈넉한 늦은 밤,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고, 독경 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새벽 3시 목탁소리에 잠이 깨 마당에 나와 서면, 잠시나마 일상으로부터 해탈을 한 듯한 기분이 든다.

▲ 오세암 동자전

■ 팔만대장경

1865년(고종 1년) 오세암에는 불교 경전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인쇄본이 봉안됐다. 관음암으로 창건한 지 1200여년만의 일. 1889년 ‘설악산 오세암 경각 중건기’에는 고종 원년에 남호(南湖) 스님이 합천 해인사의 인대장경(印大藏經) 6000여권 두 질을 인쇄해 동해를 거쳐 ‘설악산’과 ‘오대산’으로 운반했다고 기록돼 있다. ‘해인사 고적 인성 대장경’ 발문에 의하면 ‘하나는 오대산(五臺山) 월정사의 암자 상원사(적멸보궁)에 봉안해 훗날 고찰한 자료로 삼고, 또 하나는 설악산(雪嶽山) 오세암에 봉안해 사람의 안목을 열어 주려 한다’라는 기록이 전해진다.

오세암에 팔만대장경 인경 보관은 자장율사가 봉정암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백담사 전신 사찰인 한계사를 건립한 이래 ‘삼보(三寶, 불·법·승)’의 완성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행한 것은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오세암의 대장전도 한국전쟁 당시 모두 불에 탔다. 1864년 해인사에서 인쇄돼 이듬해 오세암에 봉안된 지 85년 만이다. 1950년까지 ‘대장전(大藏殿)’이라는 2층 건물이 보존됐는데, 1889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세암과 봉정암이 전란중에 터만 남기고 완전히 타버린 것은 지금까지도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  망경대에서 본 오세암

오세암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이자 기도도량으로 손꼽힌다.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가 수도한 곳이고,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자리했던 곳이다. 님의 침묵을 탈고 한 곳, 내설악 깊은 산속에 자리한 오세암이야말로 우리나라 최고의 관음기도도량이 아닐까 싶다.

진교원 kwchine@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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