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복의 뉴웨이브 in 강릉] 5. 품위 있는 도시, 세련된 간판 물결을 고대하며
형형색색 무질서한 간판들 미관 저해
거리의 얼굴 간판, 손님 발길 이끌어
가게 특색 담은 세련된 디자인 속속 등장
46년 전통 서부시장 재생사업 탈바꿈
같은 위치·디자인 목간판 교체 ‘새바람’
중앙시장 내 산뜻한 과자가게 눈길
‘31건어물’ 3대째 한가지 약속 의미
글자 없이 그림으로만 표현하는 등
깔끔한 디테일 강조 미적감각 듬뿍
도시를 걷는 여행자들의 눈길은 대개 어디로 향할까. 거리는 얼마나 깨끗하고, 세련된 가게들은 얼마나 많은지가 아닐까. 도로와 거리는 공공영역이지만 건물과 가게는 대부분 개인 소유다. 그래서 겉모습은 물론 디자인이나 인테리어도 제각각이다. 사람으로 치면 건물이 외양이라면 간판은 얼굴에 해당한다. 간판 하나만 잘 달아도 가게가 달라 보이는 이유다.
강릉의 구도심 용강동에 자리한 서부시장이 그런 예다. 46년 된 이 전통시장이 3년간 재생공사를 거쳐 다시 문을 연 지 1년 좀 넘었다. 달라진 모습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간판이었다. 낡고 볼품없던 것들을 뜯어내고 같은 위치에 같은 크기로 디자인이 좋은 목간판을 걸었다. 약 50㎝ 정사각형 나무간판에는 가오리나 삼치, 소나 닭, 고추 그림을 정겹게 그려 넣었다. 현대차그룹이 후원한 재생사업으로 서부시장은 그 뒤 강릉의 새 명소가 되었다.
간판은 본래 우리 회사, 내 가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크게,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행인들의 이목을 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게 심해져 간판 공해란 말이 생겨났다. 문화적 정취가 깊다는 강릉도 예외가 아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간판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유럽의 도시들은 거리 미관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간판에 대한 규제도 강하다. 강릉시청에 간판에 대한 규제나 지침이 있는지 물어봤다. 특별한 게 없다고 한다. 자율은 좋은 것이지만 독불장군식이라면 어느 정도 간섭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강릉시가 곳곳에 써 붙인 현수막을 보면 민간의 간판에 간섭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해송이 명물인 강릉 해변을 걷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게 한둘이 아니다. 현수막을 꽉 채운 원색의 못생긴 글씨들이 관광객을 쫓아버릴까봐 그 앞을 가로막고 싶은 심정이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미적 감각을 갖춘 간판들이 초저녁 별처럼 하나둘 돋아나고 있다. 강릉을 대표하는 중앙시장에도 변화의 뉴웨이브가 일고 있다. 점집들이 즐비하고 모종과 농약을 파는 가게 옆에 산뜻한 과자 가게가 생겨났다. ‘강릉샌드’라는 작은 간판을 달았는데 군계일학이다. 몇 걸음 더 가면 큰 통창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모던한 카페도 영업중이다. 하얀 벽에 하얀 글씨로 THECAFFE라고 쓰여 있다. 감자전을 파는 식당이나 포목점도 산뜻한 간판을 달면 어떨까. 중앙시장에는 ‘31 건어물’이라는 담백한 간판을 단 가게가 아주 인기다. 31은 3대째 이어온 한 가지 약속이란 뜻이라고 한다. 현재 40대 손자들이 운영하고 있는데 오징어나 문어, 낙지 등 건어물에 다양한 맛을 가미한 제품을 파는데, 포장과 디자인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덕에 언제나 손님들로 북적인다. 재래시장이라고 간판까지 낡고 지저분할 필요는 없다.
김동찬 강릉단오제 위원장은 “도시의 문화적 수준은 간판만 봐도 대충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간판은 한 가게의 얼굴이지만 동시에 거리의 얼굴이고 도시의 얼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간판이 멋진 간판일까. 그보다 먼저 미관을 해치는 간판을 골라내는 게 쉬울 것 같다. 주변과의 조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 여기 있소’ 하면서 시뻘겋게, 새파랗게 소리치는 간판들이다. 글씨는 크고 글자는 많고 서체는 촌스럽다.
거리 곳곳을 다니면서 특이하거나 세련된 간판들을 찾아봤다. 교동에서 극단의 작은 간판을 찾았다. 너무 작아 2m 앞으로 다가가야 겨우 글자가 보인다. 흰 벽에 PERVADE라고 써놓았는데 글자의 세로가 1㎝ 남짓이다. 베이커리 카페인데 빵과 커피는 맛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었다. 스틸 크로그(still krog)란 간판도 축소지향이다. 사천면의 꽤 넓은 땅에 빨간 벽돌로 스테이와 펍, 목공방을 지어놓았는데 간판이 작아 찾기 힘들 정도다.
도심재생사업을 거친 명주동에도 눈길을 끄는 간판들이 꽤 많다.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한 카페인데 나무로 된 벽면에 ‘오월’이라고 쓴 손바닥만한 송판이 걸려 있다. 몇 걸음 건너면 오래된 떡방앗간 건물을 고쳐 로스터리 카페로 운영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봉봉방앗간’이란 레트로풍 간판은 지금은 담쟁이 넝쿨에 덮여 아예 보이지 않는다. 1년 중 간판이 보이는 기간과 안 보이는 기간이 엇비슷하다고 주인은 말한다.
어떤 집은 간판에 아예 글자가 없다. 대신 빨간 망치만 자그맣게 그려 놓았다. 다양한 패브릭과 머그잔 등을 파는 소품 가게인데, 예쁜 간판상이 있다면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아파트 상가에 자리 잡은 ‘포스트카드 오피스’는 주인의 손재주로 태어난 정겨운 간판이다. 스테이 심상도 안주인이 상호를 도형으로 풀어 디자인한 자그마한 간판을 달고 있다. 강문 바닷가에 있는 카페 ‘END TO AND’는 입구에 눈이 시원해지는 간판을 달고 있다.
경포 호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DiOSLO. 적벽돌을 쌓아 올린 3층 높이의 벽면 꼭대기에 걸려 있는 흰색 상호가 여유롭다.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마음에 두고 지은 베이커리 카페인데 공간은 실내도, 바깥도, 주차장도 다 넉넉하다. 가톨릭관동대 근처에는 오래된 작은 한옥을 리모델링해 책을 팔고, 그 뒤에 천정이 거의 10m쯤 되는 대형 적벽돌 건물이 있다. 라 몬타냐(La Montagna)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겸 카페인데 이곳 간판도 아주 겸손하다. 한옥 서고(書庫)의 흙벽에 골드색으로 쓴 상호는 숨은그림찾기에 가깝다.
개성 있는 간판으로는 버드나무 브루어리를 꼽을 수 있다. 오래 된 막걸리 양조장을 리모델링해 크래프트비어를 만드는 곳인데 맥주와 피자로 이미 유명한 곳이다. 개성 있는 로고와 문양은 한번 더 들여다 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타투 느낌이다.
강릉에서 가장 근사한 빌딩은 씨마크호텔일 것이다.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건물답게 흰색으로 담백하다. 간판도 건물을 닮았다. 어른 허리춤 높이의 얕은 백색 담장 위에 역시 흰색으로 SEA MARQ라고 쓴 게 전부다.
우리 사회도 디테일을 강조한 지 꽤 오래 됐다. 간판은 디테일을 살리기 좋은 대상이다. 세련된 간판들이 잔잔한 파도처럼 일렁이는 도시를 보고 싶다.
컬처랩 심상 대표 simba363@naver.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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