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 언어의 산더미 SNS···비트겐슈타인이 봤다면 ‘침묵’ 처방 내리지 않았을까[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기자 2023. 8. 24.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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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언어 뒤에 숨은 사람의 메시지

지난주에 시작한, ‘무한히 자유로운 소통’이 실현된 이상향(理想鄕)의 약속과 함께 태어났지만 결국은 불통의 언어의 무덤으로 전락해버린 SNS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이어서 한다.

소통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말과 글 짓기를 주업으로 하는 나 같은 사람은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게 되는 고민이다. 학생들과 함께 논문을 쓰고 읽으며 “이것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을까?” “이 문장은 어떤 뜻일까?” 물으며 언어와 씨름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전달하는 데 있어 지금 쓴 문장이 필요 이상으로 더 긴가, 아니면 너무 짧은가 하는 작문에 대한 고민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과연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의 생각을 알아줄 것인가’이다.

부지깽이 전설

불통에 부지깽이 들고 덤빈 학자
언어·현실 탐구로 과학 해명 추구
“말의 뜻은 사용자에 의해 결정”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철학자 칼 포퍼와 열띤 논쟁 끝에 부지깽이를 꺼내 휘둘렀다는 이야기기 전해지는 케임브리지 연구실. 박주용 교수 제공

2010년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 있는 친구의 연구실을 며칠 방문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를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1946년 10월, 킹스칼리지에서는 런던 정경대학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1902~1994)가 ‘철학적 문제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청중 가운데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과 버트런드 러셀(1872~1970)도 있었는데, 철학의 본성에 관하여 생각이 아주 달랐던 포퍼와 비트겐슈타인 사이의 열띤 논쟁이 비트겐슈타인이 난로에서 벌겋게 달아오른(케임브리지의 10월 밤은 참으로 어둡고, 춥고, 축축하다) 부지깽이를 꺼내들고 포퍼에게 달려드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내 친구는 그 전설의 결투(?) 현장이 바로 아래층에 있다면서 데려가주었고,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나온 분에게 구경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흔쾌히 그러라고 해주었다. 철학사에서 제일 과격했던 전투 기념비 따위를 걸어놓진 않은 평범한 사무실이었는데, 구경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나 같은 과객의 요청을 수도 없이 들었겠지만 매우 친절했던 그 학자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철학과 과학을 잇는 징검다리, 언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언어 본질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큰 족적을 남겼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교수를 역임했다.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로 불리는 그는 살아서는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라는 단 한 권의 책을 냈는데, 사후에 그가 남긴 초고를 집대성해 발간한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Untersuchungen)와 함께 현대 언어철학의 토대로 인정받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이하 논고)나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를 처음 볼 때 제일 인상적인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특이한 글 쓰는 방식일 것이다. 여러 문단이 연속체처럼 엮여 흘러가는 긴 글이 아니라, 논리학의 대가가 아니랄까봐 딱딱 번호를 매긴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져있다. <논고>는 아예 수학 책에서나 볼 법한 짧은 명제들로 되어있고, <탐구>는 노자(老子)의 도덕경과 비교될 정도로 함축적이고 난해하기로 이름이 났다. 단문의 연속인 것이 흡사 요즘의 X(옛 트위터)를 보는 기분도 든다. 비록 아래 서술할 이유로 그에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소중한 글이지만 말이다.

물리학도 시절 내 주변엔 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논하던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학문의 목적이 바로 ‘언어’와 ‘현실’을 탐구함으로써 ‘과학’의 한계를 알아내는 것이었기에, 과학의 깊은 의미가 궁금한 과학자라면 꼭 알아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논고>에서는 아예 다음과 같은 명제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명제 4.11: 참인 명제의 전체가 자연과학(또는 자연과학의 언어)의 전부를 구성한다.

명제 4.112: 철학의 목적은 사고(思考)를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철학이란 교리(敎理)의 모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철학의 성과는 본질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철학의 결과물은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명제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철학이 없다면 사고는 구름처럼 흐리고 불명하다. 철학은 사고를 뚜렷하게 만들고 경계선을 날카롭게 해주는 것이 임무이다.

명제 4.113: 철학은 논쟁되고 있는 자연과학의 경계를 결정해준다.

이 정도면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한여름 설악산 중턱을 오르다가 만난 계곡물처럼 맑게 말을 한다고나 할까?

위 명제들의 뜻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론에서 주창한 “진공에서 빛의 속력은 일정하다”라는 명제를 보자. 이 명제를 두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는가? 햇빛, 달빛, 전구의 빛 등 다양한 모든 빛에 대해서 성립하는가? 빛의 속력은 어떻게 잴 수 있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속력이 일정하다는 것인가?

자, 하나의 명제를 갖고서도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인데 각각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게 함으로써 위의 명제가 더욱 명확해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임무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학위 논문 발표를 디펜스(defense), 즉 ‘방어’라고 부른다.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대해 성공적으로 방어해야만 그 학위 논문이 올바른 명제로 되어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의 박사도 외국에서는 모두 ‘철학박사(Ph.D.)’이다.

다시 비트겐슈타인을 만나러 가다

‘언어 놀이’ 이론으로 보는 ‘불통’
말 뒤의 마음을 읽지 못하기 때문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수록
올바른 이해 위한 경청 필요해

유명한 철학의 전장(戰場)을 방문해 받았던 작은 감격은 그 후 직업 과학자로서 바쁜 나의 삶 속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희미해지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년 전 케임브리지를 다시 방문했을 때 불현듯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쳇바퀴 도는 듯한 생존형 연구 일상에서 벗어날 기회를 찾는 심정으로 <탐구>를 읽기 시작하였다.

젊은 군인으로서 1차대전 전장에서 썼다는 <논고>에 나타난 언어철학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조금 사라진 듯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의 뜻이란 언어의 사용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언어 놀이(language game)’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놀이의 규칙은 하나가 아니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자기가 쓴 <논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푸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를 학문에도 ‘판매 후 무한 책임 서비스 제도’를 도입한 최고의 양심학자로 불러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 ‘말의 뜻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화자(話者)에게 달려있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비트겐슈타인의 <탐구> 27번 문단에 그 실마리가 조금 나와 있다. 여기에서 그는 누군가가 “물!”이라고 소리 지르는 행위를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화자는 정말로 물리세계에 존재하는 물을 가리킨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목이 매우 마르니 물을 가져다달라” 또는 “마당에 불이 났으니 꺼야 한다”처럼 그의 의지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어떤 말의 뜻은 화자가 정한 틀에 따라 결정되고, 각자는 자기만의 틀을 따라 언어 놀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지금 우리를 본다면

좁디좁은 학교 숙소 안 거실에 놓인 작은 식탁에 앉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따라 읽어가면서 나는 비로소 같은 언어를 쓰는 두 사람 사이에 왜 그렇게 말이 안 통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그 언어가 한국어이든, 영어이든 상관은 없다. 우리 시대에 불통은 국적을 불문한다). 사람의 말을 이해하고 싶으면 눈에 보이는 글자나 귀에 들리는 말소리만으로 불충분하기 때문에 이 ‘언어 놀이’의 마당에 들어와 있는 이들의 마음, 성격, 의지 같은 것을 알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내 뜻을 올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다.

온라인 공간을 덮어버린 저 무의미한 죽은 언어들의 거대한 산더미가 오늘 하루에만 얼마나 더 커졌을지 상상해본다. 언어라는 가면 뒤에 숨어있는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뱉은 말의 개수만큼 커졌을 터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일수록 더욱더 나를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해 정성을 들여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그저 같은 말을 반복하고, 더 크게 말하고, 더 자극적으로 말하다가 결국 타인에 대한 비하로 끝나는 만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일수록 그 진의를 이해하려고 경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생각이 똑같지 않다고 가치없는 말로 치부하는 만큼. 그만큼 더 커졌을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몇 번이나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

이러한 자신의 신념이 도전을 받으면 부지깽이를 들고 결투할 정도로 치열하게 언어의 본질을 찾으려고 평생 힘을 쏟은 비트겐슈타인이 지금 살아있어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천둥과 같은 침묵

목청 높인 언어의 부끄러운 풍요
필요한 건 반성과 사색의 ‘침묵’
비트겐슈타인이 영면해있는 케임브리지의 묘지와 그의 비석. 박주용 교수 제공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면서 간헐적 우울증에도 시달렸지만 마지막에는 “난 아주 좋은 삶을 살았다고 말해주오”라며 눈을 감은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지내던 숙소에서 불과 몇㎞ 떨어진 ‘어센션(Ascension·예수승천) 교구 묘지’에 묻혀있었다.

빌려서 타고 간 트라이엄프 보너빌 바이크를 묘지 입구에 세워두고 그의 무덤을 찾아 걸어가는 길은 도심과 바로 붙어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우리나라였다면 ‘[애]세계 최고 철학자의 무덤[도]. 재케임브리지 빈 향우회’라는 표식이라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며 피식하는 사이 도달한 그의 비석은 아주 평범했다. 흙과 나뭇잎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돌아 마침내 그를 마주한 나는 그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몇 분을 서있었다. 대답할 리 없는 그였지만 나는 ‘목청만 높이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마음속으로 묻는 시늉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나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내 마음에 ‘진중한 침묵’이라는 표현을 새겨주며 “이것이 당신이 찾는 답이요”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진중한 침묵. 그것은 언어라는 기적 같은 능력으로 축복을 받았지만 반성하고 사색하는 법을 잊음으로써 그 가치를 한없이 떨어뜨리고 있는 부끄러운 풍요(an embarrassment of riches)를 사는 우리에게 해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 침묵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는 그 어떤 사람의 말보다도 더 큰 천둥소리를 내고 있다.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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