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 자유민주주의? 검사전체주의
요즘 기업들이 난리다. 경제도 어려운데 정부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달 초에는 새만금에서 열린 ‘2023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조직위원회의 준비 부족으로 행사가 파행 운영되자 정부의 각종 요구사항이 기업들로 쏟아졌다. 한 대기업은 이동식 화장실을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다. 화장실로 끝이 아니었다. 화장실에 쓸 물이 필요하다고 해서 급수차도 보내야 했다. 화장실에 불도 켜고 에어컨도 틀어야 하니 발전기도 보내줬다. 교대로 이 장비들을 챙기기 위해 수십명의 인력도 지원했다. 행사장에는 대기업 소유 골프장의 카트까지 지원됐다고 한다. 잼버리 행사장 내부를 오갈 때 이용할 교통수단이 필요해서였다. 골프장 내장객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다른 대기업은 지난 1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팝 슈퍼 라이브 콘서트’에 공짜로 물품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더 높은 곳에서 다시 요청이 와서 결국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창 시즌 중인 프로축구 K리그에도 불똥이 튀었다. 폭염 때문에 당초 새만금 야외 특설무대에서 열릴 예정이던 K팝 콘서트 무대로 전주월드컵경기장이 차출되더니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억원을 들인 경기장 잔디가 망가졌고, 긴급 복구 작업을 벌였지만 예전 상태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FC서울은 망가진 잔디 탓에 홈경기 이점을 살리지 못한 듯 지난 19일 경기에서 비긴 뒤 감독이 사퇴하는 등 홍역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재가입 문제로 4대 그룹이 바빴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지난 16일과 18일 임시회의를 열었다. 원래 22일 정기회의가 예정돼 있었지만 전경련 관련 판단을 내려달라는 계열사 요청으로 앞당겨 회의를 연 것이다.
삼성전자·삼성SDI·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증권 등 5개 계열사는 복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21일 비정기 이사회를 열었다. (주)LG와 LG전자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21일 ESG위원회를 열었다. 22일 전경련이 임시총회를 열어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로 간판을 바꿔달기 전 이 사안을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전경련 재가입이 뭐 그리 급한 일이라고 없던 일정을 만들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멘토’로 불리는 전경련 회장 직무대행 김병준씨가 요청하기도 했지만 “용산에서 직접 챙기고 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한 대기업 임원은 말했다. 다른 대기업 임원은 “6년 동안 전경련 없이 잘 지내왔다. 우리는 아쉬운 게 없다. 대통령실에서 아쉽겠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과거 보수정부는 전경련을 통해 대기업들에서 돈을 걷어 보수단체를 지원토록 하고, 이들 단체를 친정부 시위나 야당 정치인 낙선운동에 동원했다.
박근혜 정부 때는 청와대 요구로 설립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기업들이 거액을 출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신동빈 롯데 회장이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았다.
대기업 임원이 한숨을 쉰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전경련에 재가입한다는 것은 이런 사건에 다시 말려들 가능성이 생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전경련의 새 이름인 한경협의 류진 신임 회장은 ‘정경유착을 근절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에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재출범 과정 자체가 의혹투성이인 조직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용산의 요청을 거부하기도 어렵다. 윤 대통령은 이재용·신동빈 회장을 기소한 검사 출신이다. 이런 정권에 밉보이면 당장 어떤 곤욕을 치를지 모른다. 윤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카르텔 척결’을 외친다. 카르텔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담합하거나 연합하는 기업들을 일컫는 경제용어가 그 출발점이다. 대기업들을 전경련으로 한데 모으는 일이 카르텔을 척결하는 일인지, 부추기는 일인지 묻고 싶다.
윤 대통령은 틈날 때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한다. 일이 생기면 민간 기업의 자원까지 총동원해 밀어넣는 행태, K팝 아이돌을 북한의 모란봉악단인 양 무대에 서라 말라 하는 행태가 과연 자유민주주의적인지 묻고 싶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이런 행태에 ‘검사전체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김석 경제에디터 s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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