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 바탄과 삼척의 닮은꼴 고통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서쪽으로 100㎞ 정도 가면 바탄반도가 나온다. 역사책에는 미군과 필리핀 포로 8만명이 일본군에게 끌려다녔던 1942년 ‘바탄 죽음의 행진’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한데, 이를 기리는 추모관 말고는 그날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이곳 바탄 주민들의 삶은 다른 이유로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1973년 석유 위기라는 배경 속에서 바탄반도 왼쪽 모롱 지역에 620㎿(메가와트)급 경수로 2기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고, 1976년에 건설이 시작됐다. 스리마일 사고, 단층대 우려, 설비 결함을 겪으면서 건설 중단과 재개가 되풀이됐다. 주민들은 1985년 인민 총파업을 벌이며 원전 건설에 격렬히 저항했고, 바탄 원전을 반대하는 투쟁은 반독재 투쟁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바탄 원전은 건설이 거의 완료된 상태였지만 1986년 체르노빌 사고로 다시 한번 중단됐고, 다음해 필리핀의 피플파워 혁명은 마르코스 독재와 함께 바탄 원전 프로젝트도 종식시켰다. 그러나 반도의 다른 두 곳에서 2013년과 2017년부터 석탄화력발전소가 가동을 시작했다. 원전이 생산할 전기를 석탄화력이 대신했고, 기업과 정부가 찾아낸 에너지 식민지는 같은 지역이었다. 바탄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당했고, 석탄 분진과 황 냄새에 고통받았다. 필리핀의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골동품 바탄 원전의 재가동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이제는 소형모듈원전(SMR) 사업이 제안되지만, 주민들의 목소리는 배제돼 있다.
한국의 삼척에는 원전 백지화 기념비가 두 개나 있다. 하나는 정부가 1991년 근덕면에 원전 건설을 발표하자 1993년 8월29일 주민 총궐기로 막아낸 후 1999년에 8·29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세운 비석이다. 다른 하나는 이명박 정부가 2012년에 다시 삼척을 원전 예정구역으로 고시하자 총궐기와 주민투표를 통해 다시 한번 철회를 이끌어낸 뒤 2019년 같은 날짜에 기념탑의 반대편에 세운 것이다.
삼척 주민들은 핵발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고향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에너지 기업은 삼척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옛 동양시멘트 폐광산 터와 맹방해변에선 삼척블루파워가 짓는 2100㎿급 석탄화력발전소 공사가 한창이다. 삼척 주민들이 원한 것도 아니고 그 전기를 삼척에서 쓰는 것도 아니다.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과제 앞에서 신규 석탄발전소를 또 짓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탈석탄과 탄소중립을 공언한 정부들은 민간이 적법하게 추진하는 발전소 건설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아름다운 해변이 파괴되고 석탄을 실은 트럭이 주민들을 위협하게 됐고, 공정률은 90%에 이르렀다.
하지만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는 있다. 지난해 가을 시민 5만명이 석탄발전 사업 신규 허가를 중단하고 이해관계자를 지원할 수 있는 근거를 담은 탈석탄법 제정 청원에 서명해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고, 10개월 만에 발의까지 성사됐다. 이 법안이 상임위를 통과하고 본회의까지 가려면 많은 반대를 뚫어야 할 것이다. 물론 탄소 배출량과 경제성에 대한 냉정한 계산 때문에라도 이 법은 통과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의 이윤과 편의를 위해 바탄과 삼척의 고통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논의돼야 한다.
김현우 탈성장과 대안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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