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콘크리트하이머
“1954년에 오펜하이머가 견뎌야 했던 고통과 치욕은 매카시 시대에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서문에 쓰인 문장이다.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은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원자폭탄이 완성된 이후, 군인들이 오펜하이머의 품에서 그 폭탄을 빼앗아 가는 장면이다. 폭발 실험에 성공하자마자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에 대한 권한과 권리를 모두 박탈당한다. 말 그대로 그의 손을 떠나버린다. 원자폭탄이 언제, 어떻게, 어디에 사용될지 조언은 하지만 요식 행위일 뿐이다. 그는 중대 결정 과정에서 제외된다. 결단은 정치인의 몫이었다.
그에게서 멀어지는 폭탄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의 옥녀의 것과 닮아 있다. 아이를 갖고, 낳을 때까진 가장 귀한 존재처럼 애지중지 떠받들어지지만 아들을 낳자마자 옥녀는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를 볼 권한과 권리도 모두 뺏긴다. 오펜하이머와 씨받이는 당대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었다. 세계대전과 냉전이 있었기에 엄청난 시간과 공간, 인력과 자본이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투입됐다. 기형적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가 씨받이 소녀, 옥녀를 희생양으로 필요로 했던 것처럼 말이다. 폭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두 사람은 일종의 매개자가 되고 만다.
최근 영미권에서는 ‘바벤하이머’라는 신조어가 유행 중이다.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쌍끌이 흥행을 빗댄 말이다. 한국에선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가 여름 흥행의 주역이다. ‘콘크리트하이머’ 정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국적도, 언어도, 배경도, 장르도 다른 두 작품이지만 하나의 합성어로 묶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내부자와 외부자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다.
유대인인 오펜하이머는 나치에 대해 깊이 분노했고 한편 불안해했다. 원자폭탄 발명에 매진했던 가장 큰 이유도 나치가 먼저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공공의 적은 나치였기에, 당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 개발 과정과 정보를 소련과 공유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제안하곤 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였고, 당시 러시아는 같은 편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그때 적은 전체주의 국가들이었다.
하지만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 세상은 급변했다. 소련은 정보를 나눌 동지가 아니라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이 돼버렸다. 함께 싸우던 소련이 적이 되자 오펜하이머의 말과 사상, 이력들은 죄다 반국가 행위의 증거로 돌변한다. 매카시즘의 연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오펜하이머>에 등장하는 보리스 패쉬라는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혈통인 보리스 패쉬는 그 어떤 반공주의자들보다 더 격렬하게 공산당 척결을 외쳤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였던 아버지의 이력과 혈통 때문인지 보리스 패쉬는 자신을 증명하듯 러시아를 증오한다. 그런 보리스 패쉬에게 이상적인 정보 공유와 연대를 주장하는 오펜하이머는 반국가 공산주의자로 몰기 딱 좋은 인물이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파수꾼도 비슷하다. 재난 이후 단 한 동의 아파트가 남게 되자 아파트는 생존의 절대적 요소가 된다. 아파트 사람들은 안팎을 나누어 내부인과 외부인을 분리하고 경계를 강화한다. 외부인 추방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쪽은 잠입한 외부인이다. 내부인이 된 외부인은 극단적 혐오와 단속의 선봉대로 나선다. 그래야만 자신의 진짜 정체성이 가려질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매카시즘은 과학계만 뒤흔든 게 아니다. 문화예술계를 비롯해 미국 전 사회를 휩쓸며, 수많은 이들의 밥그릇을 빼앗고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당시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조직된 청문회의 명칭은 ‘반미활동조사위원회’였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반국가활동조사위원회 정도 될 듯싶다. 공교롭게도, 거의 100년 전 미국을 휩쓸었던 반국가라는 단어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일상어처럼 쓰이고 있다.
미국을 위해 생애를 바친 오펜하이머는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적이 아님을 증명하느라 내내 시달렸다. 필요로 하는 순간,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는 이유로 말이다. 소수 집권세력과 다른 말을 하면 반국가 세력으로 몰렸던 시절의 불행과 공포, 영화에나 나오는 먼 나라의 과거 이야기였으면 싶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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