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뺏기'...법원이 제동 걸까
악순환의 시작…이명박 정부의 KBS 사장 해임
2008년 8월 8일. KBS 이사회가 정연주 사장 해임제청안을 가결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돼 임기 1년 3개월을 남기고 있던 정 사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5개월 만에 해임됐다.
정연주 사장 해임 과정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감사원이 특별감사를 벌여 정 사장이 내지 않아도 될 법인세를 1천500억 원이나 더 내서 KBS에 손해를 끼쳤다고 발표하면서 정 사장을 해임하라고 KBS 이사회에 통보했다. 법원이 조정해 준 액수대로 법인세를 낸 것이 느닷없이 ‘배임’으로 둔갑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처리할 KBS 이사회의 인적 구성을 바꾸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진행됐다. 당시 KBS 이사진은 통합민주당 성향 8명과 한나라당 성향 3명. 먼저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방통위원장)이 김금수 KBS 이사장을 두 차례 만나 정 사장의 거취를 언급하며 압박했다. 김 이사장이 곧 자진 사퇴하자 그 자리를 보수 언론학자 유재천 교수로 채웠다. 이어 조상기 이사를 압박해 자진 사퇴시키고 방석호 홍익대 교수로 교체했다. 방 교수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 추천 KBS 이사였는데, 정연주 사장의 연임에 반대하며 사퇴했던 인물이다.
다음 차례는 동의대 교수인 신태섭 이사였다. 이번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가 직접 해임시켰다. 교육부가 동의대를 압박해 'KBS 이사 겸임 사실을 학교에 미리 알리지 않은 점'을 문제삼아 신태섭 교수를 해임하도록 만든 뒤, 방통위가 이를 다시 문제삼아 KBS 이사직에서도 해임시켰다. 이렇게 기존 8대3에서 5대6으로 인적 구성이 역전된 이사회는 감사원의 해임 요구 통보가 오자마자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처리했고 사흘 뒤 이명박 대통령이 재가했다.
정연주 사장은 해임 뒤 배임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2012년 초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해임 사유가 사라지면서 해임처분도 취소하는 판결이 나왔다. 정 사장 해임을 위해 사전에 해임했던 신태섭 이사 역시 해임처분 취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시 KBS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미 KBS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캠프 언론특보를 지낸 김인규 사장 체제였다.
10년 만의 ‘공수 교대’… 문재인 정부도 KBS 사장 해임
2018년 1월 22일. KBS 이사회가 고대영 사장 해임제청안을 가결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돼 임기 10개월을 남기고 있던 고 사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8개월 만에 해임됐다.
고대영 사장의 해임 사유는 정연주 사장 때와는 달리 감사원 등 국가기관의 개입이 아닌 KBS 내부에서 발생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정권에 순치된 운영이 구조화되며 나타난 문제들이었다. 8가지 해임 사유는 ①지상파 재허가 심사 결과 최초로 합격 점수 미달과 조건부 재허가 ②KBS 신뢰도와 영향력 추락 ③파업 사태를 초래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해 직무수행능력 상실 ④졸속으로 추진한 조직개편으로 조직 내 반발과 갈등 초래 ⑤방송법 등을 위반한 인사 처분 남발 ⑥상위 직급 과다 운영 등 인력 운영 부적정 ⑦허위 또는 부실 보고로 이사회의 심의·의결권 침해 ⑧기타 개인 비리 의혹(국회 도청사건 관여 등)이었다.
고대영 사장 해임안 처리를 위해 KBS 이사회의 인적 구성이 바뀌는 과정은 이명박 정부 때와 비슷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이사진은 자유한국당 성향 7명과 민주당 성향 4명. 먼저 노조와 시민단체의 압박을 받은 김경민 이사가 자진 사퇴한 자리에 조용환 변호사가 보궐 이사로 선임됐다. 이어 방통위가 강규형 이사를 해임했는데, 이는 업무추진비 327만 원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감사원 감사 결과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이 자리를 김상근 목사가 채웠다. 이사회 구도가 5대6으로 역전된 뒤 고대영 사장 해임안이 처리됐고 문재인 대통령이 재가해 해임 절차가 완료됐다.
고대영 사장은 해임취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KBS 이사회가 제시했던 8가지 해임사유 중 5가지(①~⑤)가 인정된다며 해임처분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2심 법원은 5가지 사유에 고 사장의 책임이 있긴 하지만 해임시킬 수준의 잘못은 아니라며 해임처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KBS 사장의 임기제는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위한 것이어서 해임 사유는 매우 엄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판결이 뒤집힌 데는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1심과 2심 사이에, 고대영 사장에 앞서 해임됐던 강규형 이사의 해임이 부당했다는 확정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법원은 강 이사가 업무추진비 327만 원을 유용한 것이 공영방송 이사를 해임할 수준의 잘못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대영 사장 2심 법원은, 강규형 이사가 위법하게 해임되지 않았다면 이사회 구도가 유지돼 고 사장도 해임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봤다. 해임 3년이 지나 취소 판결을 받았지만 고 사장과 강 이사 역시 다시 KBS로 복귀할 수는 없었다. KBS는 이미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양승동 사장 체제였다.
MB 시절로의 회귀… 윤석열 정부의 공영방송 이사 무더기 해임
5년 만에 다시 정권이 바뀌자 익숙한 과거가 재현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공영방송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방통위부터 장악하기 시작했다. 먼저 문재인 정부가 임명한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해임했다. 종편채널 재승인 심사 과정에서 TV조선 점수를 고의로 낮추는 데 관여한 혐의로 검찰이 기소한 것을 근거로 삼았다. 문재인 대통령 몫인 김창룡 부위원장이 임기 만료된 자리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상인 위원을 임명했다. 역시 임기가 끝난 안형환 위원 자리에는 야당이 된 민주당이 최민희 전 의원을 새로 추천했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계속 임명을 미루며 공석으로 남겼다. 이렇게 해서 문재인 대통령(2)과 민주당(1) 몫 3명과 국민의힘 몫 2명이던 방통위 구도가 1대2로 역전됐다.
다음 수순은 전임 정부에서 그랬듯 공영방송 이사회 구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방통위는 먼저 KBS 윤석년 이사를 해임했다. 역시 TV조선 재승인 심사 과정에 부적절하게 개입한 혐의로 검찰이 기소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어 업무추진비 사용 등에 관한 감사를 벌여 남영진 이사장을 해임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강규형 KBS 이사 해임과 거의 같은 과정이었다. 즉각 보궐이사로 황근 교수와 서기석 전 헌법재판관이 선임돼 KBS 이사회는 민주당 성향 5명, 국민의힘 성향 6명으로 구도가 뒤바뀌었다.
동시에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진 교체도 진행됐다. 방통위는 사장 선임 과정에 부적절하게 개입하고 현 안형준 사장의 차명 주식 의혹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다는 MBC 제3노조의 문제제기를 그대로 수용해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의 해임 사유로 삼았다. 아직 감사가 끝나지도 않은 업무추진비 유용 의혹까지 해임 사유에 포함됐다. 방통위 예고대로 조만간 김기중 이사까지 해임한 뒤 보궐이사 2명을 선임하면 방문진 이사회도 민주당 성향 4명, 국민의힘 성향 5명으로 구도가 역전된다.
다음 수순은 정해져 있다. KBS 김의철 사장과 MBC 안형준 사장을 해임하고 윤석열 정부 입맛에 맞는 사장으로 교체하는 것이다.
근본 원인은 공영방송 지배구조…바로잡을 기회는 있었다
15년째 되풀이되는 악순환의 근본적 원인은 현행 공영방송 지배구조다. 이사회가 사장을 선임하게 돼 있지만 최종 임명권자는 대통령이다. 사실상 정권이 공영방송을 통제하도록 되어 있는 셈이다. 독일 공영방송 ZDF는 60여 명으로 구성된 방송평의회가 사장 선임과 해임 권한을 가지며 총리의 최종 재가는 받지 않는다.
공영방송 이사회를 관리감독하는 기관인 방통위 위원을 여야 정치권이 나눠 먹게 제도화 한 것도 악순환의 원인이다. 문재인 정부 방통위원만 해도 대통령·민주당 몫 3명 중 1명(김현), 그리고 국민의힘 몫은 2명 모두(안형환, 김효재)가 전직 국회의원이었다. 방송 전문가가 아닌 정치인이 방통위 의사결정을 좌우할 수 있는 구조 속에서는 정권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춰 공영방송에 개입하는 걸 피하기 어렵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개선할 기회가 없진 않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 초기, 언론계·학계·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이 가능하도록 지배구조를 바꾸는 방법을 놓고 다양한 논의가 깊이 있게 진행됐다. 문재인 정부도 주요 정책과제로 삼았다. 국회에서도 여야 가릴 것 없이 여러 버전의 방송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국회 의석 3분의 2를 차지하고서도 끝내 이 숙제를 풀지 못했다. 임기 초반에는 이명박 정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KBS 사장을 교체해 상대 진영의 반발을 키웠다. 임기 중반을 넘기면서는 소위 ‘조국 사태’ 관련 보도에 불만을 품고 허위보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우도록 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추진하는데 전력했다. 야당과의 대치 정국이 이어졌고, 언론노조마저 ‘기본적 언론자유 훼손 법안’이라며 반대투쟁에 나선 끝에 언론중재법 개정은 무산됐다. 그러는 사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법안에 대한 논의와 처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 상태에서 정권이 국민의힘으로 넘어갔다.
윤석열 정부가 노골적인 공영방송 장악에 나서고서야 야당이 된 민주당은 바빠졌다. 공영방송 이사진을 21명으로 대폭 늘리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사 추천권을 국회 5명, 시청자위원회 4명, 방송 관련 학회 6명, 방송기자연합회 2명, 한국PD협회 2명,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2명으로 배분해 정치권의 개입을 축소시키는 내용이었다. 전체 이사진의 3분의 2 찬성으로 사장을 선임하는 ‘특별다수제’도 담았다. 대통령의 공영방송 사장 최종 임명권은 그대로 남았지만, 기존보다 진일보한 법안이라고 평가된다.
민주당은 절대 다수 의석을 활용해 이 법안을 단독으로 본회의에 부의했다. 그러나 이미 기존 방송법 틀 안에서 공영방송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 국민의힘은 ‘야당의 방송장악용 법안’이라며 맞섰다. 민주당이 본회의에서 단독 처리하더라도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무력화시킬 것이라고 예고했다. 결국 여야간 합의가 없다면 방송법 개정은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민주당이 행정부와 국회를 모두 장악했던 문재인 정부 시절을 그냥 흘려보낸 결과다.
15년째 되풀이되는 악순환…법원이 제동 걸 수 있을까
제도 개선이 이미 물건너간 가운데, 방통위에 이어 공영방송 이사진 재편까지 거의 완성한 윤석열 정부가 KBS와 MBC 사장을 교체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다. 15년째 되풀이되고 있는 정권의 ‘공영방송 뺏기’ 악순환에 제동을 걸 뾰족한 방법은 없다. 그나마 당장 가능성이 있는 건 사법부의 역할이다.
지난 21일 방통위가 해임시킨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은 즉각 법적대응에 나섰다. 행정법원에는 해임 효력을 정지하는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지방법원에는 해임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앞서 해임된 남영진 KBS 이사장도 윤석열 대통령이 해임안에 최종 서명하는대로 같은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행정법원이 두 이사장의 해임 효력정지 가처분을 빨리 인용해준다면 KBS와 MBC의 이사회 구성은 변경되지 않고 정부가 원하는대로 사장 해임 절차를 밟을 수도 없게 된다.
물론 가처분 인용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기본적으로 법원은 국가기관의 행정 행위를 신뢰하고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후적으로 국가기관의 잘못된 행정으로 개인의 손해가 발생할 경우엔 소송을 통해 (주로 금전적으로)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질 여지가 있다. 지난 15년 동안 정부가 해임한 공영방송 이사와 사장들에 대한 가처분과 본안소송 결과가 다수 누적돼 이번 사안에 대한 판단 근거로 작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해임된 KBS 정연주 사장은 배임이라는 해임 사유가 아예 사라지면서 최종적으로 해임처분이 취소됐다. 앞서 해임된 KBS 신태섭 이사 역시 동의대의 교수직 박탈이 위법했다는 판결에 따라 방통위가 해임시킨 사유가 소멸됐고 이에 따라 해임처분 취소 판결을 받게 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해임된 KBS 고대영 사장과 강규형 이사, 그리고 방문진 고영주 이사장은 책임을 질 만한 잘못을 저지르긴 했어도 그것이 공영방송 경영진을 해임까지 시킬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해임취소 판결을 받았다. 고대영 사장의 경우엔 정부가 강규형 이사를 미리 해임해 이사회 구성을 바꾼 것이 절차적으로도 부당했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들은 모두 해임된 직후 해임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가 기각당했지만 결국엔 해임이 취소됐다. 이 과정에서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 해임의 정당성 기준이 정립됐다. 첫째, 방송법에 따라 임기를 보장받은 공영방송 사장과 이사를 해임하기 위해선 그 사유가 매우 엄격해야 한다는 것. 둘째, 공영방송 사장 해임을 위해 이사진 구성을 인위적으로 변경시키는 것은 부당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최근 해임된 남영진 KBS 이사장과 권태선 방문진 이사장은 결국 재판을 통해 해임이 취소될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방통위가 밝힌 이들의 해임 사유들은 실제로 사유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과거 정부의 해임취소 사례들보다 더 사소한 문제라는 게 객관적 평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임 효력을 사전에 정지시키지 않는다면, 행정법원 가처분 제도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지도 모른다.
뉴스타파 김성수 sskim@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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