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에 날조된 이승만, 지울수 없는 건국 아버지이자 혁명가" [고견을 듣는다]

이규화 2023. 8. 24.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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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체로 번영 기초… 좌파와 공산주의자엔 그것을 일군 이승만은 '원수'
대통령 하야는 '대통령 부정선거' 때문 아냐… 이기붕씨가 부통령 선거에서 욕심부려 벌어진 일
1959년 부흥부장관 역임한 선친 신현확 전 총리로부터 밥상머리 교육으로 이승만 진면목 알아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박동욱기자 fufus@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박동욱기자 fufus@

[]에게 고견을 듣는다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이승만'이 역사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한미동맹 75주년, 정전협정 75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을 설계했고 정전을 한사코 반대했던 인물에 대한 관심은 당연할 것이다. '이승만 현상'을 들여다볼수록 현 시국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해방공간의 이념전쟁이 재현되고 있다. 인민민주주의가 여전히 자유민주주의에 도전 중이다. 인민민주주의조차도 기실 가면이고 공산전체주의가 실체다. 김일성 3대 족벌체제에 유화적이고 심지어 동조하는 세력이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해치려 한다.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는 일부 집권세력조차 거기에 가담했다. 다행히 작년에 자유민주주의 공화정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기치를 내건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굽었던 시류가 다시 바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국면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국체로 나라를 건국한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꽂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승만은 현대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왜곡되고 흑칠이 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을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 현대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고 국체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 일에 평생을 매진해온 분이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신 이사장은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2017~2021년)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진면목을 알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다. 개인적으로도 신 이사장은 이승만 대통령과 간접적 인연이 있다. 선친인 신현확 전 총리가 1950년대 부흥부장관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경제관료로 일할 때 아버지에게서 이 대통령의 진면목을 밥상머리 교육으로 접할 수 있었다.

신 이사장으로부터 왜 지금 이승만이 부각되고 있는지, 이 현상으로부터 우리 국민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또 이승만의 삶과 사상을 간략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신 이사장은 좀처럼 언론에 나서지 않는다. 언론 인터뷰를 모두 사양해왔다. 이번엔 여러 차례 간청 끝에 어렵게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인터뷰는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우호문화재단에서 가졌다.

대담 = 이규화 논설실장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진면목을 알리는데 회장님이 많은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아닙니다. 저보다 더 힘쓴 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오래전부터 많은 분들이 알게 모르게 이승만 대통령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했어요. 제가 최근에 그나마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 내지는 이승만을 추모하는 소사이어티에서 알려진 이유는 뭐라고 할까, 잠자고 있던 이승만 이야기를 꺼내게 돼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2017년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는데 그때 문재인 정권에서 유독 이승만에 대해서 많은 비난을 하고 폄하하고 왜곡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념사업회를 맡으셨네요.

"1976년부터 있었던 기념사업회를 그때 아무도 회장을 맡으려 하지 않았어요. 하는 수 없이 이승만 대통령 양자분인 이인수 박사 내외분이 찾아오셔서 선대(先代)의 인연을 거론하시면서 꼭 맡아 달라 하셔서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쭉 제가 기념사업회장을 했고 얼마 전 다른 분께 넘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알려졌죠."

-노년층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어렴풋하나마 알고 있는데, 젊은 세대는 잘 모릅니다. 학교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매우 단편적인, 그것도 4·19 의거의 대상이었던 정권의 대통령이라는 정도로밖에 교육하지 않습니다. 왜 이 시점에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조명되나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시기에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가 자꾸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가 국가정체성에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좌파니 우파니 하지만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이건 자유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문제거든요. 그리고 북한은 사실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왕권정치와 똑같은 전제주의체제요 왕권을 세습하는 체제잖아요. 그런 북한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자꾸 늘어나고, 또 평화라는 이름 아래 핵 위험을 무릅쓰고 화해하자고 하잖아요. 심지어는 공산통일을 하려고 3년간의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을 주적이 아니라고 하는 마당입니다."

-국가 정체성의 위기에서 발단이 되었다는 말씀이군요.

"우리 자유민주주의 헌법에서 '자유'를 빼는 개헌을 하겠다는 정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국가주의'를 지향하거든요. 시장주의가 아니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지 아니하고 국가가 주도해서 하려는 것을 국가주의라고 하는데, 문재인 정권은 초기부터 국가주의와 똑같은 소득주도성장 경제정책을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건 공산당에서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자본주의를 택한 자유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복지 문제에 있어서도 전부 국가가 나서서 돈을 나눠줬습니다. 추경까지 해가면서요. 경제를 시장에 맡기지 아니하고 국가가 나서서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니까 국가의 정체성에 큰 위협이 오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대두된 것 같습니다.

"70여년 기적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본바탕이 됐던 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입니다. 그 두 가지를 국가 정체성으로 선택해 오늘날까지 그야말로 가장 성공한 모델이 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른 이념이 나타나서 '국가주의'를 하겠다? 거기에다가 무슨 남북화해라는 명분으로 퍼주기는 물론이고 스스로 남한을 무장해제하는 쪽으로 가겠다? 세계 5000년 역사가 증명하듯 힘없는 평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무력을 기반으로, 힘을 바탕으로 평화가 오는 것이거든요. 스스로를 무장해제 하는 평화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전 정권에서는 '자유'는 사라지고 무슨 '남북화해'니 '평화' 같은 구호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일본의 식민지가 돼서 35년을 신음하다가 광복을 맞이했을 때인 1945년 8월 15일부터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 1948년 8월 15일까지 그 3년 동안의 상황과 매우 유사한 시기를 맞고 있다고 봅니다. 이승만이 지금 조명되는 이유는 이렇게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이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업적을 남겼는데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김일성주체사상을 따르는 부류를 주사파라고 그러잖아요. 주사파와 좌파에서 볼 때 최대 원수가 누굴까요? 이승만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으면 자유민주 대한민국은 탄생 자체를 못 했어요. 그러니까 남한만 잘 살게 된 그 원인을 만들어낸 이승만이 그들에겐 최대의 원수인 겁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3대와 이 땅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의 최대 적은 이승만인 겁니다. 그러므로 어떡하든 이승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야 되는 겁니다. 남한 정권을 정통성이 없는 걸로 만들어야 되고요. 그래야 북한이 사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이승만을 역사에서 묻어버렸을 뿐 아니라 날조까지 했습니다. 단순한 왜곡도 아니고 아예 날조를 했어요. '건국의 아버지'를 그렇게 대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왜곡 날조하고 묻은 데는 다 그런 배경이 있었군요.

"1960년 4·19가 일어날 때까지 국민들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한 사람도 없었고 무슨 저항운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장기집권을 하면서 좀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소간 횡포가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4·19가 일어난 직접적 원인은 3·15 부정선거 아닙니까? 4·19가 일어나서 나라가 안정이 됐느냐, 그게 아니거든요. 형편없이 불안해지니까 보다 못한 군부가 일어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이 거론되는 것이 몹시 껄끄러운 겁니다."

-이승만의 카리스마 때문인가요.

"그렇죠. 완전히 아무런 기반도 없는 곳에서 그야말로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던 그 세력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를 이승만이 도입했던 것 아닙니까? 처음으로 국민이 직접 선출한 지도자를 갖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잖아요. 정통성의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거론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묻었던 겁니다. 단, 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왜곡 날조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단합을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 시대를 묻어버린 겁니다. 그 시대 어떤 일이 일어나고 무슨 일을 했느냐가 다 덮였어요. 그런데 저는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영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본 건가요?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주요정책에서 모두 이승만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어요. 그분의 중요한 정책은 모두 이승만 노선을 그대로 따른 겁니다. 심지어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이 됐던 1차에서 6차까지 30년간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1차 계획도 이승만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6개년계획이 밑바탕이 됐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 때 부흥부(당시 초대 부흥부장관이 고(故) 신현확 총리로 신 회장의 선친)가 마련해놓은 것을 4·19 기간 1년을 빼고 1962년부터 1차 5개년계획에 거의 그대로 실행한 겁니다."

-그런 사실을 우리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경제개발에는 관심이 없었던 걸로 오해를 하는데요.

"다 묻었으니까요.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이 산림녹화와 그린벨트 정책을 펴서 굉장히 칭송을 받지 않습니까? 그린벨트, 산림녹화는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 수립을 하자마자 1949년 4월 5일부터 시작한 겁니다. 식목일도 이승만 대통령 때 시작됐습니다. 그린벨트는 산림을 녹지화 하자는 건데, 이승만 정부 때 용어를 영어로 바꾼 게 그린벨트입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경제노선이 '산업혁명'이잖아요. 산업화를 추진한 거 아닙니까? 그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한 겁니다."

-그런가요? 그 역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한미동맹을 맺어서 8년간 미국으로부터 계속 경제지원을 받을 때 미국 정부하고 우리 정부가 정말 피터지게 다퉜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이승만 대통령이 원수지간이 될 정도로 다퉜어요. 뭐 때문에 다퉜느냐 하면, 미국은 경제 원조를 하면서 '너희 그 돈으로 미제 비료 사고, 그거 갖고 농사짓고 부족하면 밀 수입해서 좀 먹고 살라'는 식이었습니다. 원조해준 돈으로 한국이 농업국가가 되는 것을 원했어요. 미국은 한국이 미국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 국가가 돼주기를 원했죠.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산업화와 수출입국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수입대체와 수출입국 정책을 추진한 겁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수입하던 것들을 모두 우리가 우리 공장에서 만들겠다' '우리가 경쟁력 있는 상품 만들어서 수출하고 그 돈으로 우리가 필요한 거 사 오겠다'고 했어요."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던 강단이 거기서도 묻어나네요.

"그런 의지가 1차 6개년산업개발 계획에 반영된 것이고 3개년 계획으로 1차, 2차 나눠서 추진하려 했던 겁니다. 그것을 미국하고 싸워가면서 밀고 나가서 결국은 미국의 논지를 격파하고 이긴 겁니다. 그렇게 해서 최초로 설립된 공장이 충주비료공장입니다. 농사지을 비료부터 우선 우리가 생산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그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신 분이 돌아가신 저의 선친입니다. 산업개발 1차 3개년 계획, 2차 3개년 계획 이렇게 6개년 계획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것이 공교롭게도 1960년 4월 19일입니다."

-그렇습니까?

"이 대통령이 하야 성명 내신 게 28일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게 3·15 부정선거로 이승만 대통령이 당선됐다고 알고 있어요. 부정선거가 일어난 건 부통령 선거였어요. 그 당시 우리나라 선거법은 대통령 따로 뽑고 부통령 따로 뽑았어요.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미 야당의 후보가 그해 2월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승만 후보는 유권자의 50% 이상만 투표하면 자동 당선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에 무슨 부정이 개입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 같은 당시 상황을 또한 대다수 국민들이 모르고 있어요.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이,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 씨가 부통령에 당선됐어요. 그래서 내각도 자유당과 민주당이 같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이었던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독재가 됩니까? 여소야대 상황에서 부통령이 야당인데요. 다만 그때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였던 이기붕 씨가 욕심을 부려가지고 꼭 부통령이 되고 싶었던 거죠. 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85세 고령이셨죠. 사실 언제 돌아가실지 몰랐어요. 부통령을 하고 있어야 승계를 받을 수 있어서 당시 부통령 선거가 치열했던 것입니다. 그 부통령 선거에서 조직적으로 이 씨와 그 주변 세력들이 부정을 일으킨 겁니다."

-이 대통령은 책임을 지고 하야했지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하야했습니다. 국민들이 쫓아낸 게 아니라 자기 발로 내려온 겁니다. 만약에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했다면 절대로 못 내려옵니다. 내려오면 죽으니까. 전 세계 역사상 독재자가 자진 하야한 경우는 전무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1965년 이 대통령 서거 후 장례식에는 애도 국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서울 광화문에서 한강까지 인산인해였다고 들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경무대(나중에 청와대로 개칭) 앞에서부터 광화문 서울역 용산까지 애도 물결이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애도하러 나온 여성들은 다 하얀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왔어요."

-이사장님은 선친 신현확 전 총리께서 1959년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을 하시는 등 이승만 대통령과 간접적으로 인연이 많은 것 같은데요.

"예. 저희 선친이 6·25전쟁 나면서 정부에 들어가신 후 60년 4·19 때까지 장관까지 하셨으니까, 어렸을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맨날 이 대통령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듣고 자랐어요. 생각할수록 아버지는 저에게 좋은 스승이었습니다.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했던 아버지의 경험을 밥상머리에서 맨날 듣고 자라 놓으니까 아주 친숙하고 아는 게 좀 있는 편이에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미담이 너무나 많아요."

-그러고 보면 이사장님은 가족 외에는 어느 분보다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풍부하고 정확한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이승만 박사께서 65년에 돌아가시고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셨다가 1970년 이화장으로 돌아오셨을 때 저는 중학생이었어요. 명절이 되면 어머니 손잡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인사 드리러 갔습니다. 양자이신 이인수 박사가 조혜자 여사하고 결혼하기 전부터 이화장을 저와 어머니는 출입을 했었던 거죠. 그래서 조혜자 여사 결혼 이후에도 항상 가족같이 지냈었어요."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음해하고 폄훼하는 갖가지 왜곡된 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1946년 6월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선언한 정읍선언이 분단의 씨가 됐다는 것인데요.

"명백히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우남(이승만 대통령의 호) 네트워크라는 걸 2년 전 결성해가지고 공식적 활동인 이승만기념사업회와 별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네트워크에서 이번에 정읍 6·3 선언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6·3 정읍 선언 77주년 기념행사'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졌습니다. 당시 사회는 공산·사회주의 기풍이 만연했어요. 이승만 박사는 자칫 공산화가 되고 말겠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끼시며 국민을 계도하고 계몽하는 차원에서 남선순행이라는 것을 해요. 남쪽 지방 20여개 도시를 둘러보러 다녔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당도하는 곳마다 적게는 3만, 많게는 10만 명이 모였습니다. 이 박사는 독립국가를 건립하기 위해서 국민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떠한 나라를 만들어야 될 것인가, 자유민주주의 나라여야만 한다, 시장경제여야만 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계몽하러 다닌 겁니다. 그런데 해방된 바로 다음 해인 1946년 2월에 이미 북한에서는 국가를 수립했어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했습니다. 그건 그냥 위원회가 아니고 정권입니다. 정부예요. 그리고 3월에는 북한 전 국토를 대상으로 토지계획을 했어요."

-그런 일은 국가나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건 이미 정부고 국가죠. 토지개혁을 해서 소작농을 없앤 게 아니고 전 국토를 무상 몰수했어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다 가진 거예요. 분배 없이 말입니다. 결국 농민들은 '농노'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또 당시 미소공동위원회에 희망을 걸었는데, 1차 회담도 다 깨지고 재개될 가능성도 없어 보였어요. 북한은 정부를 수립해가지고 이미 공산정권이 토지 개혁을 하고 내각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이 잘못하다가는 공산 통일되고 말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남한만이라도 우선 자유민주 정부를 수립해야 되겠다 싶어 남한 단독정부 선언이 나온 겁니다. 공산당 정부가 아닌 자유민주 정부를 세우자는 선언을 한 겁니다. '이승만 독트린'인 겁니다."

-이후 정부 수립까지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그 방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읍 선언 이후 남한 정부 수립 방식을 어떻게 할 건가를 유엔에게 넘기게 되고, 유엔 감시 하에 1948년 5·10 총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거고, 제헌의회가 구성돼 헌법도 만들고 국회에서 대통령선거도 해서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 정부와 국가가 탄생한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때 정읍에 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정읍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발상지다'라고요."

-정읍 시민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정읍 시민들이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요. 정읍 시민들이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정읍에 이승만 박사의 정읍 선언 기념비를 세우려고 합니다. 다음 78주년 기념식에서 기념비를 제막하려고 합니다. 지금 적당한 장소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공원을 조성해 하는 게 좋을지도 논의 중입니다."

-우남 이승만네트워크를 또 만드셨는데, 어떤 분들이 참여하고 있고 어떤 활동을 하시나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고, 자유진영의 단합을 위해서 많은 분들이 임의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그런 자유민주운동 단체의 대표들을 네트워킹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만들었습니다. 이승만 정신을 알리는 활동을 하는 단체에는 이승만 박사와 근대사를 연구하는 교수, 학자 그룹이 있어요. 그다음에 이승만 박사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고 따르는 교육자와 목사님들, 이들을 후원하는 경제인들 이렇게 4개 그룹을 네트워킹 하자는 취지입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와서 다행히 전 정권에서 훼손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정체성을 세우는데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정부는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초대 건국 대통령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정말 세계만방에 수치입니다. 세계 6대 강국에 들어섰다고 장담을 하고 있는 판에 창피한 일입니다. 자기네 나라 건국 이야기를 폄하하고 건국 대통령 동상도 없이 무시하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됩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이종찬 광복회장이 반대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적극 도와달라고 하자 그러겠다고 했는데요.

"반대해선 안 되는 겁니다. 설령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나라 후손들이 미래가 있습니다. 아니 자기 나라의 탄생을 축하하고 그 탄생된 나라에서 먹고 자라야 되는데, 탄생 자체를 폄하하면 어떻게 애국자가 되고 싶겠습니까? 심지어 다른 나라들은 없는 신화도 만들어서 갖다 붙이는데요. 그게 건국 신화거든요. 근데 우리 건국 얘기는 그야말로 강력한 하나의 드라마입니다. 대한민국 역사는 스펙터클한 드라마예요. 20세기와 21세기 이념 전쟁을 뚫고 살아남아 번영하고 있잖아요. 승리의 역사지요.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몰락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은 2차 대전 후 독립한 수많은 국가 중에 자유민주체제로 성공한 유일한 국가거든요. 전 세계 국가의 흥망성쇠 역사에서 단 75년 만에 꼴등 국가가 10위권으로 도약한 일은 전무후무해요. 생각해보세요. 기술도 자원도 인적 자원도 물적 자원도 다 없는 상황이었어요. 더군다나 6·25 전쟁으로 전국이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 나라를 이끌고 온 분이 이승만 박사입니다."

-1940년대 사회주의가 전 세계에서 발흥하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선택한 것은 이승만 박사 아니고선 설명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수많은 나라가 독립을 해요.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서 얼추 150개국이 독립을 합니다. 대한민국이 그중 하나였어요. 149개국이 1950년 현재 거의다 공산화로 갑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공산화가 안 되고 살아남은 유일한 국가가 대한민국이에요."

-그런 기적을 일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진면목을 국민들이 알아야 될 텐데요.

"알아야죠. 자라나는 세대일수록 알아야죠. 정말 자긍심을 가져야 할 역사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동안 통탄을 하고 살았어요, 왜 이 일을 우리 사회가 해나가지 못하는지. 근데 기회가 온 겁니다. 이번 기회에 못하면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갈지 모릅니다. 이번 기회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다 힘을 합쳐가지고 해나가야 된다고 봅니다. 저는 기념관을 지어서 그 당시에 모든 자료들과 증거들을 전시해서 이승만에 대한 '팩트 전쟁'을 하자는 겁니다. 무엇이 역사상의 팩트인지요. 역사라는 건 흔적이 있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미국 일본에도 다 있습니다. 심지어 6·25전쟁에 참전했던 16개국에도 있습니다. 조선 말, 일제 식민시대, 그다음에 근대화시대까지 모두 있는 대로 보여주자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승만 박사는 조선, 대한제국, 일제, 대한민국을 관류하는, 그 자체로 거대한 역사입니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참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소위 '촛불혁명'으로 태어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촛불혁명의 온전한 의미와 발원지는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촛불혁명에 이승만 대통령요?

"조선 말과 대한제국 때 고종이 철도며 광산이며 국가재산을 러시아 일본에 팔려고 하자 국권 수호하자고 운동을 일으켰던 분이 이승만입니다. 교과서에 보면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한 분이 서재필 박사로 돼 있는데, 사실은 독립신문도 그렇고 협회도 그렇고 이승만 박사가 창립 멤버로서 참여하고 이승만 박사와 서재필 박사 두 분이 주도를 한 겁니다. 대중 연설을 한 분은 전부 이승만이에요. 1898년 3월 15일에는 종각 앞에서 대중 강연을 했는데, 고종과 정부를 향해, 이런 건 당장 고치라고 일갈했어요. 아관파천 때는 러시아한테 은행 설립권을 주려하자 다 철회하라고 주장했거든요. 그때 한성시민이 17만이었는데 1만명이나 모였어요.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만민공동회를 구성하자고 해서 만민공동회가 탄생한 겁니다. 모두 이승만 연설로 탄생하는 것이에요."

-타고난 연설가로서 이승만은 그때부터 태동한 거네요.

"고종이 만민공동회, 특히 이승만을 버거워서 죽을 노릇이거든요. 그해 10월에 가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대신들을 만민공동회에 참석시켜 주장을 들어보라고 했어요. 그리고 주장을 정리해서 올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걸 다 받아줄 테니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헌의6조'가 나온 겁니다. 의회 기능을 하는 추밀원을 구성하라는 요구도 있었는데, 들어주겠다고 발표해요. 그래놓고는 독립협회 사람들 다 잡아들입니다. 사전 정보를 접한 이승만은 급히 피해서 체포가 안 돼요. 그때부터 거리 항쟁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촛불항쟁'인 겁니다."

-이후 투옥되는 시련을 맞지 않습니까.

"이승만이 주도해 촛불과 횃불을 들고 시위를 합니다. 철야 시위도 처음이었습니다. 그걸 왕정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모의하고 있다는 반역 혐의를 씌워가지고 이승만을 투옥합니다. 1899년 1월에 전격 체포되고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의 옥살이를 합니다. 이때 이미 이승만은 시민운동가요 혁명가로서 인생을 시작하고 이름을 떨칩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국권침탈이 노골화 하자 고종이 특사를 보내기 위해서 석방을 합니다. 일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미국에 도움을 청해보자는 거였지요. 특사를 보내야겠는데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몇 명 없었어요. 또 신분이 확실해야 했죠. 민영환 등 대신들이 강력히 주장을 해 이승만을 미국 대통령한테 특사로 보내기 위해 무기수에서 석방을 하는 겁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이승만은 훤히 꿰뚫고 있었나요.

"선교사와 목사들이 넣어주는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감옥 안에서도 세계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으니까,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하더라도 일본이 이미 제국주의 침략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 준비를 해서 갑니다. 5년 만에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PhD(박사학위)를 획득합니다. 미국 사람도 이루기 힘든 기록입니다."

-박사학위 논문도 매우 훌륭했다고 들었습니다.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가 자기들 비용으로 출판을 했어요. 나라도 없는 식민지 청년으로서 대단한 일이었지요. 이승만 박사는 연구할수록, 알면 알수록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라는 걸 깨닫게 돼요. 그러나 아직 연구가 충분치 않습니다. 사실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에도 당시 통신수단이 전신과 편지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기획해서 밀사를 보내고 기획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어요. 안 그랬으면 3·1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불과 한 달 이내에 임시정부가 8군데에서 생기는데, 그 8군데 모두에서 정부 수반으로 이승만을 추대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이승만 박사는 독립군 활동 같은 직접 전선에서 싸우지 않았고, 외교적 노력만 했다고 활동을 낮춰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 그야말로 찬란한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대통령도 만나고 그랬잖아요. 윌슨 대통령이 너무 좋아했죠. 그러나 한일합방이 되는 해인 1910년 국민 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합니다. 돌아와서 YMCA 총무를 합니다. 일제가 종교는 탄압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2년 동안 전국을 두 바퀴 돌면서 YMCA 32개 지구를 만듭니다. 거기에서 이승만 박사가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갖고 공부를 합니다. 독립정신이 마치 성경처럼 공부되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1913년 일제가 체포하려 하자 미국으로 망명하는 겁니다. 이후 미국 조야와 유럽 등지에서 유력 신문의 기고와 책('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발간 등을 통해 지도층들과 교류를 합니다. 그것이 나중에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박사가 목숨을 담보하고 하와이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일화는 유명한데요.

"일제가 이승만 목에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붙입니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하와이에서 중국인 선장하고 상의해 중국인 시체로 위장해서 태평양을 건너 상해 임시정부에 부임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배 밑창 관속의 시체로 위장해서 태평양을 건넜다고 생각하면, 한편의 드라마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고 가슴이 뛰지 않나요? 이렇게 이승만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팩트 갖고 하자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악랄한 흑색선전 중에 하나가 6·25 때 '도망갔다'는 거거든요.

"그런 말도 안 되는 흑색선전에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아니 전쟁이 나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습 공격으로 전선이 밀리고 있는데, 국가원수와 사령부가 작전상 후퇴를 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국가원수가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면 전쟁에서 지고 나라가 망하게 됩니다. 그건 말 같지도 않은 겁니다. 제가 강연을 가면 그런 질문을 가끔 받는데, 저는 호통을 칩니다. 저는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김일성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김일성은 중국 대련에 있었습니다. 이걸 도망 간 것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대중들에게 강연을 자주 많이 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승만의 진면목을 알게 돼 얻는 수확은 무엇일까요.

"벌써 130여 차례 했습니다. 단 저는 방송이나 언론에 노출되는 건 싫어요. 이제 의미 없는, 정말 국력 낭비하는 이념 논쟁은 그만하자는 겁니다. 역사가 이미 이념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승리로 판가름 났는데, 우리는 아직도 이러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세계 6대 산업강국이라는 나라가 맞습니까? 누워서 침 뱉기 아닙니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 아, 정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길 진짜 잘 됐네. 이렇게 멋진 나라였어?'라는 생각을 갖게 하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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