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가면 쓴 ‘그린워싱’ 기업들, 응징이 시작됐다
[Cover Story] 소비자는 분노하고 규제 당국은 칼 빼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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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친환경 패션 스타트업 ‘볼트 스레즈(Bolt Threads)’는 지난해 영국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와 함께 ‘비건(vegan) 가죽’으로 만든 3500달러(약 466만원)짜리 가방을 출시했다. 비건 가죽은 식물성 인조가죽을 그럴싸하게 부르는 용어다. 볼트 스레즈는 2020년 버섯 뿌리를 배양해 만든 ‘마일로(Mylo)’라는 명칭의 비건 가죽을 개발해 3억달러(약 4000억원)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착한 친환경 소비’ 열풍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그런 볼트 스레즈가 지난달 돌연 마일로 생산을 포기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친환경’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패션 시장을 휩쓸던 비건 가죽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건 가죽은 파인애플잎, 사과 껍질, 선인장 같은 식물 소재를 사용하지만, 동시에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폴리우레탄(PU)이나 폴리염화비닐(PVC)을 섞어 만든다. 그래서 환경에 해악을 끼치는 건 동물 가죽과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가짜 친환경’ 메시지를 전파해 온 그린워싱(greenwashing)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철퇴를 맞기 시작했다. 그린워싱은 실제로는 환경친화적이지 않지만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려고 친환경 경영을 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품질이 떨어지거나 하자 있는 상품에 ‘녹색 이미지’를 씌우는 상술도 포함된다. 1983년 미국 환경운동가 제이 웨스터벨트가 피지의 한 호텔에서 ‘환경을 위해 수건을 재사용해 달라’는 안내문을 보고 이 용어를 만들었다. 웨스터벨트는 “세탁비를 아끼려고 애꿎은 환경 핑계를 댄다”며 분노했으며, 2000년대 들어 그린워싱이란 용어가 널리 퍼졌다.
그동안 인간과 자연의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하는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은 응당 기업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기업이 환경친화적이라는 메시지를 내놓으면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2020년 불어닥친 ‘ESG(환경·사회·지배 구조)’ 열풍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각국의 정부·소비자들이 이제는 ‘진짜 친환경’과 ‘가짜 친환경’을 구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주요 선진국 소비자들은 오랫동안 성역화된 ‘친환경 마케팅’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으며, 가짜로 드러난 경우 소송을 통해 응징하겠다는 결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ESG 마케팅에 올라타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이익을 늘리려던 기업들은 이제 ‘그린워싱 리스크’를 점검해야 할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소비자단체의 검증이 까다로워졌을 뿐 아니라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를 비롯한 각국 정부 규제 기관이 그린워싱을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처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짜 친환경’ 기업에 철퇴
친환경 마케팅으로 빠른 성장을 구가한 기업 중에서 ‘녹색 포장지’가 벗겨지며 실적이 추락하는 기업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그린워싱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자 고객들이 등을 돌린 회사들이다.
식물성 대체육 업계를 선도해 온 미국 ‘비욘드미트’는 이달 초 암울한 실적 발표를 했다. 이 회사의 올해 2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30% 감소한 1억210만달러로, 순손실은 5350만달러에 달했다. 비욘드미트는 2019년 5월 나스닥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빌 게이츠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투자하며 ‘ESG 대표 주자’로 떠올랐다. 한때 주가가 공모가의 10배인 235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현재는 12달러 안팎으로 최고점 대비 5% 수준으로 폭락했다.
비욘드미트가 추락한 건 환경을 위해 식물성 대체육을 먹어야 한다는 당위론이 희미해진 가운데 진짜 고기보다 2~4배나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식물성 대체육은 진짜 고기보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40~90% 적다고 알려졌지만 동시에 온갖 식품첨가물이 들어간 ‘초가공식품’”이라며 “역겹고, 밍밍하고, 이상한 식감이라는 소비자 인식을 하루아침에 해소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때 ‘신발계의 애플’로 칭송받던 미국 신발 업체 올버즈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올버즈는 친환경 소재로 신발을 제작한다고 강조해 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래리 페이지 구글 공동 창업자가 즐겨 신는 신발이라고 알려지며 2021년 11월 나스닥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
그러나 최고 26달러대에 이르던 올버즈 주가는 폭락을 거듭해 요즘 1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상장 당시 올버즈는 공모 설명서에 ESG를 91번, 지속 가능성을 107번 언급했다. 하지만 처음 제시한 ESG 공약의 절반 이상을 슬그머니 철회했다. 탄소 배출량 계산 방식이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받아왔다. 게다가 신발이 금세 구멍 나고 닳는다는 소비자 불만이 쌓이면서, 모호한 친환경 이미지를 앞세워 품질 저하 문제를 가린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가 미국 기업 202곳의 친환경 성과를 분석한 결과, 제품 품질이 떨어지는 기업이 그린워싱 마케팅을 할 경우 고품질 기업보다 소비자 만족도가 8배 더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HBR은 “낮은 상품 경쟁력을 친환경으로 보완하려던 회사가 그린워싱 논란에 휩싸이면 기댈 곳이 없어지기 때문에 위험한 마케팅 전략”이라고 했다.
◇성난 소비자들 소송으로 응징한다
그린워싱은 이제 응징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기업들이 연일 내놓는 친환경 메시지를 소비자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했다. 컨설팅 회사 센수인사이트가 지난해 영국 성인 168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 71%는 기업의 친환경 주장이 제대로 된 검증을 받았을 리 없다고 답했다.
소비자들은 적극적으로 칼을 빼들고 있다.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한다는 메시지로 기만당했다는 확신이 들면 적극적으로 소송을 제기한다. ‘블룸버그 로(Law)’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연방 법원에 제기된 ESG 관련 소송은 모두 2700여 건으로, 이 중 환경 관련 소송(1467건)이 가장 많았다.
▼패딩 브랜드 ‘캐나다구스’의 그린워싱을 비판하는 동물보호단체 PETA 회원의 속옷 시위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조지 리는 지난 2020년 캐나다 고가 패딩 브랜드인 캐나다구스를 상대로 뉴욕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조지가 문제 삼은 건 패딩 모자 테두리에 붙어있는 ‘100% 캐나다산 코요테 털’에 관한 표현이었다. 당시 캐나다구스의 상품 태그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있었다.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지속 가능한 천연 모피 조달에 대한 우리의 약속, 우리의 모든 천연 모피는 인증된 포획 업체에서만 구매합니다.’ 이에 대해 조지는 “캐나다구스가 올가미와 덫으로 코요테 목을 조르고 뼈를 부러뜨려 모피를 얻는 사냥꾼과 거래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허위 내용으로 소비자보호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법원은 리의 주장을 일부 인정했다. 결국 캐나다구스는 결국 2022년 동물 털 사용을 전면 중단했다.
패스트패션 브랜드 ‘H&M’도 친환경 제품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이 회사는 지난해 친환경 의류 ‘컨셔스(conscious·의식 있는) 컬렉션’ 탓에 미국 뉴욕과 미주리에서 각각 소송을 당했다. 소비자들은 H&M이 여성복 100여 벌을 지속 가능성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처럼 허위 광고했으며(뉴욕), 재생 플라스틱 병으로 만들었다는 폴리에스테르 섬유의 환경적 이점을 과장했다(미주리)고 주장했다. H&M은 최근 미주리 소송을 가까스로 이겼지만, 뉴욕 소송 대응에 고심하고 있다.
‘나이키’ 역시 그린워싱 의혹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지난 5월 미주리주에 사는 마리아 과달루페 엘리스는 “나이키의 지속 가능 컬렉션 상품 2452개 가운데 실제 재활용 소재로 만든 제품은 239개로 10%에 불과하다”며 나이키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마리아는 “나이키가 허위 친환경 마케팅으로 사람들이 옷을 더 많이 사고, 더 빨리 버리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델타항공은 ‘세계 최초의 탄소 중립 항공사’라는 표현을 쓴 광고를 했다가 지난 5월 소비자에게 소송당했다. 원고 측은 “델타가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이미지를 내걸며 항공권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소비자 권익을 침해당했다”고 몰아붙였다.
▼그린워싱 논란에 휩싸인 패스트패션 브랜드 H&M의 ‘의식있는 컬렉션’ 영상
◇'친환경 허풍’ 발각되면 처벌한다
세계 각국 규제 기관도 그린워싱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미국 FTC는 지난해 유통 체인 월마트의 ‘허위 친환경’ 활동을 적발해 그린워싱 사건으로는 사상 최고 액수 벌금인 300만달러를 부과했다. 월마트는 합성 레이온으로 만든 침대 시트·베개·욕실 매트를 독성 없고 깨끗한 ‘친환경 대나무’로 만들었다고 허위 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FTC는 월마트 단속을 계기로 10여 년 만에 친환경 마케팅 표기 규제안인 ‘그린 가이드’ 개정 작업에 뛰어들었다. 탄소 중립, 탄소 제로, 지속 가능 등 19개 환경 용어 사용 기준을 정리한 그린 가이드는 쏟아지는 그린워싱 소송의 심사 근거가 될 전망이다.
영국 경쟁시장국(CMA)은 올 초부터 식음료와 청소·위생용품 같은 생활 소비재 부문의 그린워싱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CMA는 “시중에 유통되는 식기 세척 용품의 91%, 화장실용품 100%가 환경친화적 마케팅을 하고 있다”며 단속 배경을 설명했다. 영국 광고 규제 기관인 광고표준청(ASA)도 HSBC은행, 석유 회사 셸, 아랍에미리트 에티하드항공 등 대기업 수십 곳의 친환경 광고를 그린워싱으로 판단해 금지했다.
앞서 2020년 EU 집행위원회가 친환경을 내세운 기업 150곳을 조사했을 때 그린워싱 실태가 심각하다는 점이 드러난 적 있다. 이 150기업이 출시한 친환경 표기 상품의 53%는 근거가 미약하고 오해 소지가 있으며, 40%는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EU는 지난 3월 ‘그린 클레임 지침’을 발표했다. 친환경 표시를 하려면 과학적 근거를 독립적인 제3기관에서 인증받아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매출의 최대 4%를 벌금으로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2021년 정점을 찍으며 투자금이 몰렸던 ESG 펀드도 검증대에 서 있다. 현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ESG 펀드의 증권법 위반을 대대적으로 수사하고 있다. SEC는 지난해 말 가짜 ESG 기업이 포함된 ESG 펀드를 운용한 골드만삭스에 과징금 400만달러, BNY 멜런에 150만달러를 부과했다. 도이치자산운용(DWS)도 그린워싱 펀드 운용으로 SEC와 독일 검찰 양쪽에서 수사를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공정거래위원회가 그린워싱 규제를 시작했다. 앞으로 친환경 용어를 명시적으로 쓰지 않더라도 울창한 숲과 나무 이미지, 녹색 글씨로 친환경을 위장할 경우 불공정 행위로 단속될 수 있다. 재활용 섬유 함량을 2%에서 3%로 늘린 뒤 ‘재활용 섬유 함량 50% 증가’로 표시하는 눈속임도 금지된다. 매트리스만 친환경 인증을 받은 뒤, 침대 전체를 친환경 가구로 광고하는 것도 규제 대상이다. 그린워싱으로 적발되면 과징금, 형사 처벌, 손해배상 책임이 따를 수 있다.
◇경영진 4분의 3 “조사하면 우리도 걸린다”
거센 ‘안티(anti) 그린워싱’ 파도가 밀려오자 기업들은 긴장하고 있다. 친환경 메시지가 부메랑으로 돌아와 제 발등을 찍는 일이 생길까 봐 친환경 마케팅을 재검토하는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 최대 식품기업 네슬레와 유럽 최대 통신 기업 보다폰은 전문가 자문단을 구성해 그린워싱 점검에 나섰다. 그동안 네슬레는 2050년, 보다폰은 204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만들겠다고 공언해 왔다.
구글이 지난 4월 세계 16국 기업 경영진 147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속 가능성 설문 조사는 그린워싱 리스크에 대한 기업들의 공포를 보여준다. 응답자 가운데 72%는 “철저한 조사를 벌일 경우 그린워싱으로 적발될 것”이라고 응답했고, 59%는 “지속 가능성 활동을 과장하거나 부정확하게 표현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기후 컨설팅 기업 사우스폴은 예전에 탄소 제로 공약을 내걸기 바빴던 기업들이 최근에는 구체적인 기후 목표 이행 계획을 숨기는 ‘그린허싱(침묵을 뜻하는 hush+그린워싱)’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강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국내에서도 ESG 마케팅의 법률 위반 여부를 묻는 기업들의 의뢰가 크게 늘었다”며 “정부가 그린워싱 단속 방침을 잇따라 밝히면서 글로벌 기업의 대응 사례를 면밀히 검토하는 추세”라고 했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서비스마케팅학회장)는 “세계적으로 ESG 경영이 ‘패션’처럼 유행하는 것에 회의감이 커졌다”며 “기업의 본질적인 경영와 관련 없는 친환경 마케팅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가치 경영의 방향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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