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중’ 개념의 큰 특징은 민족과 계급의 결합이죠”
“우리 역사에서 민중(民衆)이란 말의 개념이 크게 바뀌는 결정적 계기였던 신채호의 1923년 ‘조선혁명선언’ 100주년에 맞춰 책을 내게 되어 뜻깊게 생각합니다.”
흔히 “피지배 계급으로서 일반 국민”을 가리키는 민중은 ‘광주민중항쟁’처럼 항쟁이나 혁명의 주체 세력을 일컫기도 하고 때론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처럼 피지배층을 넓게 지칭하기도 한다. 7년 전 교육부의 한 관리는 “민중은 개·돼지” 운운해 질타를 받았다.
이렇게 의미의 진폭이 넓은 민중이란 말은 도대체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쓰였고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 강인철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가 최근 낸 두 권의 책 ‘민중, 저항하는 주체-민중의 개념사, 이론’과 ‘민중, 시대와 역사 속에서-민중의 개념사, 통사’(성균관대 출판부)는 그 답을 찾는 책이다.
합쳐 천 쪽이 넘는 이 저술은 지은이가 2019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 학술용어’ 프로젝트에서 민중 항목을 집필한 것을 계기로 꼬박 3년에 걸쳐 한국 현대사 문헌 속 민중 개념을 살핀 결과물이다. 그는 제1회 최재석학술상 수상작 ‘경합하는 시민종교들:대한민국의 종교학’(2019) 등 18권의 단독저술을 통해 근대 이후 종교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주로 분석해온 사회학자이다.
“정치 주체를 일컫는 개념어로 국민, 인민, 시민, 민족, 민중, 계급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 학계에서 아직 미답의 영역이었던 민중 개념을 통사와 이론 편으로 나눠 분석한 것을 우선 꼽을 수 있겠죠.” 지난 20일 이메일로 만난 강 교수에게 이번 저술의 학술적 의미를 묻자 나온 답이다.
이번 책을 보면 한국 역사에서 2천년 동안 ‘다수의 민’을 가리키는 평범한 말이었던 민중은 1920년대 들어 ‘개념 혁명’ 내지 ‘언어 혁명’을 맞게 된다. “한국 전통 사회에서 민중 개념은 철저히 통치의 대상이자 객체인 사회집단에 불과했는데요. 1920년대 초에 3·1운동 여파로 좌파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전통적 민중 기표(기호의 외양)에 주체성과 저항성이라는 새로운 기의(기호의 속뜻)가 추가되었죠.”
중국에 망명 중이던 독립운동가 신채호가 1923년에 쓴 ‘조선혁명선언’이 대표적이다. “신채호는 여기서 ‘조선 민중이 한편이 되고 일본 강도가 한편이 되어’ 벌이는 일대 격돌에서 ‘민중 직접혁명’을 민족독립의 유일한 활로로 제시했어요. 신채호에게 민중혁명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결합이었죠.” 3·1운동 직후부터 민중이란 말의 사용빈도도 급증했단다. “1920년 4월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민중이란 말이 33회나 나왔죠.”
그는 책에서 1920년대 이후 한국의 민중 개념은 대전환―잠복―재등장―급진화―재구성이라는 5막극을 거쳤다고 분석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대전환의 시기였고 30년대 중반부터 60년대까지는 잠복기였죠. 그러다 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전반기에 다시 ‘민중의 시대’를 맞았죠.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까지는 민중 개념이 급진화했고, 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는 재구성의 시기이죠. 특히 70, 80년대는 ‘민중연구 혹은 민중학’(minjung studies)이라는 다학문적·학제적 성격의 지극히 한국적인 학문 분야가 탄생하기도 했죠.”
3년 동안 현대사 문헌 속 민중 살펴
통사와 이론 편으로 나눠 개념 분석
1920년대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등
통치 대상→주체·저항성 “개념 혁명”
중·일보다 사회·정치 미친 영향 커
“수준 높은 민중론, 사회운동 자양분”
그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민중 개념을 비교한 뒤 한국의 민중 개념에서 “계급과 민족의 결합체라는 뚜렷한 독창성”을 찾았다. “민중은 기원전부터 중국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그 뒤 한국으로 전파되어 조선 시대 여러 문헌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어요. 일본은 19세기 말에야 비로소 등장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민중 개념은 대체로 ‘자유주의적 민중’에 머물렀지만 식민지 조선의 민중 개념은 민족혁명과 계급혁명이라는 이중혁명·동시혁명의 주역인 ‘혁명적 민중’으로 성큼 나아갔죠.” 그는 “중국과 일본은 민중 개념이 지성사나 사회·정치운동에 미친 영향이 한국만큼 크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처럼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민중 연구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민중이 한국 만의 독특한 개념인지 아니면 영어 피플(people)의 번역어이거나 인민의 정치적 대용어인지를 두고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대체로 70년대 민중론자들은 ‘고유어 지지파’이고 80년대 중반 이후 급진적 민중론을 펼친 이들은 대다수가 번역어나 대체어로 본단다. 저자의 생각은? “저는 1920∼1930년대와 1970년대 이후의 민중 개념은 ‘개념의 한국적 창안’에 해당한다고 봐요. 다시 말해 민중은 ‘서구 근대적 개념의 수용’ 측면보다는, 식민지화를 비롯한 안팎의 도전과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전통의 창조적 재발명’을 시도한 측면이 강하다는 거죠.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민족주의자들이 기존의 ‘민족’ 개념에 ‘사회혁명’의 요소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전통적 민중 개념에 급진적인 재해석을 기도했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중론 연구가 사회 운동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새로운 민중 개념이나 이론이 태동하는 데는 늘 선행하는 사회운동의 자극이 있었고, 역으로 새로운 민중 개념·이론은 사회운동의 발전을 촉진하곤 했죠. 사회운동가와 진보 지식인들은 그들이 대변·대표하고자 하는, ‘부단한 재구성 과정 안에 놓인 피지배 다수자’가 어떤 이들인지를 보다 정확히 알고자 노력해야 하며, 이는 결코 종결될 수 없는 과제입니다. 수준 높은 민중론은 사회운동 발전을 위한 자양분이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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