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혜 칼럼] 산업화 70년과 뿌리의 힘

한겨레 2023. 8. 24.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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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혜 칼럼]돌이켜 보면, 과학기술 분야에서 우리는 꺾꽂이식으로 나무를 기르기 시작했다. 선진국에서 키운 나무들의 줄기를 꺾어 와 심고, 거기에서 뿌리가 나고 나무로 자라도록 속성 재배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왔다. (…)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서, 꺾꽂이한 나무들은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신품종의 씨앗들로 묘목을 준비하고, 온갖 기후조건에서도 든든히 버티는 나무들로 키워내야 하는 시대의 변곡점이 도래했다.

노정혜 | 서울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

농부가 아니더라도 식물을 가꾸어본 사람은 누구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뿌리는 흙에서 물과 양분을 빨아올리며, 지하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지상의 줄기와 가지, 잎들을 모두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극심한 추위에 지상의 줄기들이 다 얼어버려도 뿌리가 상하지 않았으면 나무는 반드시 새 줄기를 뻗어 올린다. 태풍에 휘말려도 뿌리가 뽑히지 않으면, 든든히 버텨낸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맨 먼저 한글로 지은 노래의 첫머리에 뿌리 깊은 나무가 소환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구절에서 ‘용비어천가’는 기본이 튼튼한 나라의 비전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나무는 우리가 길러내야 할 후배와 후손들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기술의 변화는 기후변화와 국제정세의 급변과 맞물려 태풍처럼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는 것이 두렵고 현기증이 날 상황에서, 미래를 살아갈 후손들을 어떻게 길러낼지는 기성세대들이 안고 있는 최대의 숙제이다. 고도의 전문직이면서도 안정적인 직업이라 여기는 의사와 법관의 업무가, 심지어는 가장 창조적이라 여겨지는 예술가의 작업도, 생성형 인공지능(AI)의 활약으로 상당 부분 자동화될 판국에, 어떤 직업과 어떤 분야가 유망할지를 따져보고 일찌감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어떤 길이 열리더라도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든든한 기본 역량과 담대한 멘털을 가진 인재들을 길러내야 한다.

세계경제포럼이 올해 발간한 ‘미래의 직업 보고서’(The Future of Jobs Report)는 현재의 변화 속도를 고려할 때, 향후 5년 내 절반 가까운 사람들의 기술 역량이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란 진단을 내놓았다. 전세계 800여개 기업의 응답을 종합하여, 현재와 미래에 가장 필요한 핵심 역량으로 분석적인 능력, 창의적인 능력을 꼽았다. 그 뒤를 이어 기술에 대한 이해, 호기심과 평생 학습 능력, 회복력과 유연성, 종합적 사고 등을 꼽았다.

분석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은 초·중등교육을 거쳐 대학에서 종합적으로 업그레이드된다. 대학은 전문지식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지식을 만들어내는 장소이다. 21세기에 필요한 지식은 전공 분류를 거부한다. 따라서 지식을 전공학과의 벽에 가두어 가르치고 생산하려는 대학은 이제 더는 경쟁력이 없다. 학생들을 전공의 벽에 가두지 말고,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기본 소양, 분석적이고 창의적인 역량을 키워주는 데 대학의 미래가 있다. 다행히 요즘 이런 방향으로 교육을 혁신하려는 대학들이 생겨나고 있어 고무적이다.

최근 세계 잼버리대회의 부실한 운영으로 체면이 상당히 깎였지만, 우리나라는 외형상 이미 선진국이다. 인구 5천만명 이상 국가 중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는 세계 일곱번째 국가이고, 경제규모로 볼 때도 세계 10위권이다. 논문 출판은 세계 12위, 국제특허 출원은 세계 4위이고 혁신 역량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전쟁 뒤 폐허에서 70년 만에, 100달러도 안 되던 국민소득을 3만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린 경제발전의 근저에는 반만년 역사를 흘러 내려온 우리 민족의 디엔에이(DNA)와 역동적 문화의 힘이 깔려 있다.

그러나 후진 농업국가에서 선진 산업국가를 단시간에 꽃피워낸 데는, 과학기술이 그 기본 뿌리가 되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외국에서 공부한 과학기술 전문가들을 긴급 수혈하듯 유치하였고,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산업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비롯한 정부출연 연구소들과 과학원(현 KAIST)을 설립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대학에 연구비가 지원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대학원의 연구 기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90년대 이후 국내 대학원에서 길러진 고급 인력들이 점차 늘어났고, 기업의 연구개발도 본격화되었다. 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0년대 말 국제 금융위기를 거치면서도 우리나라는 연구개발에 지속해서 투자했고, 그 덕분에 중진국을 거쳐 고도화된 산업국가, 선진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았다.

돌이켜 보면, 과학기술 분야에서 우리는 꺾꽂이식으로 나무를 기르기 시작했다. 선진국에서 키운 나무들의 줄기를 꺾어 와 심고, 거기에서 뿌리가 나고 나무로 자라도록 속성 재배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기울여왔다. 물과 비료, 보호막을 공급하며 키운 나무들이 다행히 잘 자라 상당한 열매를 맺었고, 국가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서, 꺾꽂이한 나무들은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신품종의 씨앗들로 묘목을 준비하고, 온갖 기후조건에서도 든든히 버티는 나무들로 키워내야 하는 시대의 변곡점이 도래했다.

60~70년대 유치 과학자들에겐 따라잡아야 할 대상과 목표가 분명했다. 그 목표를 향해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연봉과 처우, 자율성과 관심의 면에서 지금의 과학자들보다 월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들에게서 꿈을 본 어린 학생들이 과학과 공학의 길로 들어섰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발전을 담보할 많은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지금 우리 앞에는 따라가야 할 추격의 대상이 없어졌다.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내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그것도 큰 걸음으로 앞서가지 않으면, 다시 뒤로 처질 수밖에 없다.

앞서가려면, 좀 더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어려운 문제들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실험정신이 투철한 젊은이들이 학교와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창의적인 시도를 과감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을 멘토링할 선배들도 자부심을 갖고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 신품종의 씨앗들이 발아하고 뿌리를 내려 미래를 대비하려면, 조바심을 누르고 씨앗의 생명력을 믿어줘야 한다. 긴 호흡을 가진 농부의 심정으로 물을 주고 가꿔야 한다. 어떤 이유로든, 설사 잡초가 카르텔을 이룰지라도, 안정적인 물 주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어떤 풍파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즐길 수 있다. 거기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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