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차, 연차, 4대보험, 계약서도 없고 퇴근시간 없는 이런 직장 있을까요"
드라마스태프·독립PD·작가 근로계약 10명 중 2명꼴
"무계약 노동 여전한 방송계 현실, 정부가 방치"
"나는 노동자, 권리보장 받아야" 인식 커져
"답변 않는 방송사에 정부 대책은 무엇인가"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월차, 연차, 휴가 없다. 4대 보험 없고, 출근 시간은 있는데 퇴근 시간 없다. 계약서 없다. 이 모든 '없음'이 바로 방송계의 관행이라 불린다. 이런 직장이 또 있을까? 방송계에는 많다” (17년차 외주제작사 방송작가 전아무개씨)
방송을 제작하는 드라마 스태프와 프리랜서 PD, 방송작가 가운데 방송사 또는 외주제작사와 근로계약을 맺고 일하는 경우가 10명 중 2명에 그쳤다.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 제기로 실태조사가 수년째 반복되지만, 정부가 방송사들에 대해 개선 조치를 강제하고 감독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류호정 정의당 국회의원과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 등은 24일 드라마스태프와 프리랜서(독립)PD, 방송작가 824명의 노동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방송제작 현장 노동환경 문제와 정책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다. 정의당은 지난해 희망연대본부 용역연구로 드라마 스태프와 프리랜서 PD, 방송작가 824명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에 임한 드라마 스태프(총 324명) 가운데 '최근 참여한 드라마에서 근로계약서를 체결했다'고 밝힌 경우는 26.5%에 그쳤다. 개인도급(프리랜서)이나 턴키계약(감독급 팀장과 계약체결)을 해 불합리한 계약을 한다고 밝힌 비율은 66.7%에 달했다. 독립PD(총 174명)들도 외주제작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한다고 밝힌 비율이 15.5%에 그쳤다. 아무런 서면계약 없이 구두계약한다는 답은 35.6%나 차지했다. 방송작가도 가장 많은 수가 외주 제작사와 구두계약한다고 답했다(24.9%).
증언에 나선 17년차 방송작가 전아무개씨는 “외주제작사는 대부분 지금도 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단 한 번도 계약서를 쓰고 일한 적이 없다”며 “일하고 있다는 증거인 계약서가 없다 보니 정부의 청년들을 위한 각종 제도 혜택도 전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20년 넘는 경력을 가진 곽아무개 독립PD도 “이 일을 시작하고 계약서라는걸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발제에 나선 김기영 방송스태프지부장은 “2018년과 2019년 고용노동부와 2020년 법원이 드라마 스태프에 대한 노동자성을 인정했음에도 불합리한 계약이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 뒤 “지난해 시행된 예술인복지법에 따라 외주제작사는 서면계약서를 작성해서 보관해야할 의무가 생겼지만 사용자가 여전히 위법적 계약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무계약 노동이 '관행'이라 불리는 것이 방송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스태프들은 법정 노동시간과 각종 사회보장 제도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였다. 스태프의 76.2%는 '산업안전 교육을 받은 적 없다'고 했고, '4대보험 가입'도 13.9%만이 모두 적용받는다고 했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집결지 출발과 도착 시간 포함)이 하루 14~16시간에 달한다고 답한 스태프가 가장 많았다(37.7%). 16시간 이상 일한다고 밝힌 스태프도 38%였다.
결방이나 산업재해, 직장 내 괴롭힘이 생겨도 스태프 책임이다. 프리랜서 PD의 42.5%가 (국가 행사나 재난, 올림픽, 월드컵 등 회사 사정으로) 결방해도 인건비가 전혀 지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업무 중 다칠 경우에도 '본인 자비로 처리한다'가 58.6%를 차지했다. 작가들도 제작한 프로그램이 결방될 때 '인건비 전액 미지급'인 경우가 67.1%였다. 방송작가의 83% PD의 79%는 인격무시 발언이나 폭언, 성폭력 등 인권침해를 겪는 경우 문제제기하지 않거나 퇴사를 택했다고 답했다.
다만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커지고 있다. PD들의 77.6%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방송사 또는 제작사와 개별 근로계약서 체결해야한다'고 답했고, 작가도 83.1%가 이같이 답했다. 드라마스태프의 경우 66.4%였다. 김 지부장은 “노동부와 법원의 스태프 노동자성 인정 이후 (제작사와 방송사들이) 사용자 의무를 회피하기 위하여 턴키계약(감독급)을 더 확대하고, 책임을 감독급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을 반영한 결과로 추정한다”고 했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처장은 방송 비정규직 노동환경이 여전히 열악한 이유로 “정부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방향 설정이 오히려 현장에 악영향으로 돌아왔다”고 진단했다. 노동부와 법원에서 이들 방송비정규직의 노동자성 인정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지만, 방송사에 후속 조치를 강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권순택 처장은 “(노동부 근로감독 결과)턴키계약이 방송 노동자한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해 '근로계약서 작성'으로 유도할 수 있는 제안을 내놔야 했다. 노동부가 노동자성을 인정한 인정한 152명의 작가들이 실질적으로 '노동자'로써 인정받을 수 있도록 감독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아 실상은 18명에 그쳤다. 노동위원회가 노동자성을 인정한 경남CBS 최태경 아나운서가 '프리랜서'로 일하지 않도록 방송사에 강력한 메시지를 줘야 했다”며 “개개인들이 거대한 방송사를 상대로 싸울 때 정부는 어떤 역할을 했나”라고 물었다.
진재연 직장갑질119 활동가는 방통위와 문체부, 노동부 등 관계부처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개선까지 이어지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일례로 2017년에 방통위·문체부·과기정통부·노동부·공정위 등 5개 부처가 합동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 발표했지만 후속 개선 조치가 미미했다는 것이다.
박혜리 희망연대본부 조직국장도 “지난해 결방에 대한 피해가 없도록 방통위가 (방송사에) 협조공문 보냈지만 아무런 답변이 오지 않았다고 공유 받았다. 올해에도 (방송사가 같은 태도를 보일 것에 대비해) 관련한 대책이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구종모 방통위 편성평가정책과 사무관은 “담당 과인 지상파 재허가 관련 과에 그 부분을 묻고 개선될 수 있도록, 간담회를 통해 반영도도록 하겠다”고 했다.
최영재 정의당 정책위원은 “공영방송사들은 조만간 이사들이 물갈이되고 사장도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는 등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방송사들이 (집권한 정부에 상관없이) 비정규직 차별하고 착취하는 악랄한 사업자의 모습을 보여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MBC나 KBS나 깊은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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