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 거리에 뜬 STOP FEMICIDE "또 여자라서 죽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우리 동생, 끝까지 죽을 만큼 저항했을 것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목소리 냈을 것입니다.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우리도 끝까지 목소리 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24일 오전, 7명의 여성들이 서울 신림동 소재 공원 앞에 섰다. 모두 지난 18일 세상을 떠난 '신림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의 지인들로, 고인과는 생활체육축구팀에서 만나 6년간 함께 활동한 사이다. 이들은 이날 열린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참여하고자 사건 현장을 찾았다.
전국 90여개 시민단체가 공동주최한 추모제엔 150여 명의 시민들이 검은 옷을 입고 함께 했다. "해맑고 예쁘고 너무나도 착했던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5일째, 고인의 지인 A 씨는 "힘차게 운동하던 우리 동생이 절대 호락호락하게 (피해를) 당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앞으로 우리도 끝까지 저항하고 끝까지 목소리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성평등이 곧 안전이다."
참여자들 손에 들린 피켓 속 문구에 이들이 내고 싶은 '목소리'가 서려있었다. 현장을 찾은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추도사에서 "매 순간 최선의 삶을 사셨을 피해자 분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라며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선 사회의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깨달을 때까지 이 외침이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10시께 서울 관악구민방위교육장 앞에 모인 시민들은 현장에서 고인을 위한 추도사를 읊은 뒤 공원 둘레길을 따라 사고 현장으로 행진했다. 고인은 지난 17일 오전 본인의 직장인 인근 초등학교로 출근하던 길에 30세 남성 최윤종 씨에게 폭행당한 끝에 이틀만인 19일 끝내 사망했다. 최 씨는 피해자를 성폭행할 목적으로 흉기를 이용해 그를 폭행해 살해했다.
그간 최 씨는 자신의 성폭행 및 폭행 혐의는 인정하면서도 '살해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날 오전 경찰에 따르면 그는 "피해자의 목을 졸랐다"는 점을 결국 시인했다. 애초 강간치상 혐의로 최 씨를 체포한 경찰은 피해자 사후 그의 혐의를 강간살인으로 변경, 오는 25일 그를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공원 입구에서 사건 현장까지는 20분 남짓의 시간이 소요됐다. 인근 주민들이 등산이나 산책을 즐기기 위해 자주 찾는 이곳 공원엔 이날도 둘레길을 따라 걷고 있는 주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사건 현장엔 최 씨의 진술대로 폐쇄회로(CC)TV가 부재했지만, 인근으로 치면 고작 5~10분 안팎의 거리에도 산불감시용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사건 현장엔 고인의 명복을 비는 추모 메시지들이 봉투에 담겨 인근 나무에 걸려 있었다. "행복하세요, 영원히 응원합니다." 현장에 도착한 시민들은 묵념과 헌화 후 신림역으로 행진했다. "여성폭력 방치국가 규탄한다." 누군가 꽃 아래 놓은 피켓 속엔 추모를 넘어 책임을 묻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여성살해 멈춰라" … 신림역 모여 '국가책임' 물은 시민들
오전 11시께 둘레길을 통해 하산한 추모제 참여자들은 그대로 신림역 번화가로 행진했다. 공원 현장에서 신림역 3번출구 인근까지 1시간가량 이어진 행진에서 참여자들은 "혼자서든 숲길이든 괜찮은 나라 만들어라", "출근길도 위협받는 세상에서 못살겠다", "여성폭력 방치국가 모두에게 위험하다", "국가가 권장하는 각자도생 웬 말이냐", "성평등과 존엄으로 인간답게 살고싶다" 등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걸었다. 한 참여자는 'STOP FEMICIDE(여성살해를 멈춰라)'라고 적힌 피켓을 높이 쳐들기도 했다.
사건 직후 당정과 경찰, 서울시 등 지자체들은 CCTV 확충,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형 도입 등 치안강화 및 엄벌주의 기조를 내세운 대책안을 내놨지만, 해당 과정에서 '강간', '여성살해' 등 여성폭력 범죄의 성격은 일절 논의되지 않았다. 여성을 강간하기 위해 살해한 명백한 '혐오' 동기에도 불구 이 사건을 여성폭력이 아닌 이상동기 범죄로만 규정한 것이다. (관련기사 ☞ 신림 '페미사이드'에도 여성 밤거리가 안전? 어디에도 '젠더'가 없다)
현장을 찾은 한 활동가는 "CCTV, 흉악범 교도소, 폐지됐던 의무경찰제의 부활 등이 '여성폭력'의 대책이랍시고 나오고 있다. 여성 시민들의 안전은 치안강화를 위해 장갑차로 무장한 국가의 통제 하에서만 보장되는 것인가" 물으며 "다른 무엇도 아닌 여성을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하는 성평등이야말로 지금의 폭력을 멈추고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키는 방법이다"라고 지적했다.
강간 등 여성폭력 범죄는 "여성을 동등한 사람이 아닌 성적인 대상 등 물화된 객체로 보는 사회적 경향성" 속에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일어난 인하대 성폭력·사망사건, 신당역 스토킹살해 사건 등 여성폭력 범죄의 국면마다 여성들이 물리적인 치안강화를 넘어 '성평등 문화의 정착'을 제기하고 있는 이유다.
다만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등 당국은 해당 사건들에 대해 '개인적인 비극이지 젠더 문제로 볼 일이 아니'라는 취지로 평하는 등 이 같은 인식을 부정하고 있어 여성들 사이에선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이날 단체 소속이 아닌 개인 시민으로서 현장에 참여한 이은지 씨는 "신림동에 사는 친한 동생은 최근 출퇴근 동선을 바꾸고도 여전히 외출하기가 불안하다고 한다. 그런 동생에게 차마 괜찮을 거라고 말할 수가 없더라"라며 "이것이 과연 개인이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건가. 개인의 문제에 불과한 건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사회와 구조의 문제다"라고 강조했다.
역시 "평범한 서울시민"이라 본인을 소개한 박정현 씨는 "저와 똑같은 평범한 여성이 낮 시간대에 출근길에 목숨을 잃었다. 너무도 자주 일어나 특정 사건을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살인이 2023년 지금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라며 "우리는 이 일들이 결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건을 막아야 했던 시점에 작동해야 했던 제도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결국 여성에게는 국가가 부재했기 때문이다"라고 호소했다.
2021년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국내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80%를 웃돈다. 이번 신림 사건에서 문제가 된 강간 범죄의 경우, 2022년 경찰청 통계 기준으로 전체 피해자의 97.1%가 여성이고 전체 가해자의 98.4%가 남성인 '성별화'된 범죄다. 여성들은 이렇게 뚜렷한 여성폭력 경향성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이 "반(反) 페미니즘 전략 등 '여성 지우기'에 골몰하고 있다"라며 정치권의 책임을 물었다.
현장을 찾은 한 관악구민은 "국민의힘 최인호 구의원은 7400만 원 밖에 되지 않는 여성안심귀갓길 사업의 예산을 전액 삭감하겠다며 여성정책은 역차별이고 페미니즘은 성파시즘이라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늘어놓았지 않나"라며 "이런 '여혐정치'를 방조해온 정치인들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여혐범죄'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토로했다.
이효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활동가는 "관악구 여성안심귀갓길 사업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의회에선 현재 ‘여성 지우기’가 계속되고 있다"라며 "정치가 나서서 여성에 대한 증오를 조장하고 평등과 공존을 부정하는데,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여성이 안전할 수 있겠는가" 꼬집기도 했다.
참여자들은 신림역 3번 출구 인근에서 마무리 집회를 가진 뒤 12시 30분께 현장에서 해산했다. 주최 측은 "(정부당국은) 성폭력과 여성살해의 근본적 원인이 '젠더에 대한 차별'에 있음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라며 "모든 분들이 오늘도 부디 '안녕히' 하루를 보내시기 바란다"고 이날 추모제의 소회를 밝혔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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