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명령 말고, 규칙
게임과 놀이는 참여 자격을 거의 묻지 않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문화적 실천이다. 게다가 게임은 디자이너가 제작을 마쳤을 때가 아니라 갖고 노는 사람이 각각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동안 완성되어가는 까닭에 그것을 둘러싼 생각과 경험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N명의 사람들이 같은 게임을 하더라도 겪은 사건, 상황, 영향은 그만큼 가지를 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게임은 ○○이다'라는 문장의 빈칸에서 벌어지는 영토 다툼에는 우리가 아는 가장 좋은 것부터 나쁜 것까지 모두 지분을 주장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게임과 놀이의 존재를 한 문장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이 매체의 본질에 맞지 않는 접근이라 생각해왔다. 꼭 써야 한다면 '게임은 ○○도 될 수 있다' 정도가 아닐까? 그만큼 게임과 놀이는 N명에게 N개의 잠재성을 제공하는 다양하고 자유로운 표현에 최적화된 매체다. N개의 진실과 오해가 동시에 발생하고 그것을 모두 품는, 상당히 피곤한 역할을 위해 고안된 문화적 발명품이 바로 게임과 놀이다.
게임은 승부를 겨루더라도 뻔하고 쉬운 합의를 피하려 하며 반전, 충돌, 의심과 망설임이 끝까지 발생하는 구조를 추구한다. 플레이어로서는 규칙 안에서 온갖 지각과 감각을 깨워 새로운 표현을 끌어내는 것이 잘 노는 것이고 끝날 때까지 끝내지 않도록 만드는 게임이야말로 잘 만든 게임이다. 특히 플레이어는 규칙의 수용에 관한 권리를 갖는다. 게임을 만든 사람도 놀이하는 이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할 수 없고, 그들의 허락을 청할 뿐이다. 또 플레이어는 제시된 규칙을 무작정 따르지 않고 의도와 목적을 의심하고, 비틀고, 저항하고, 창조할 능력도 가지고 있다. 나와 동료들은 이를 오해가 아닌 진실로 증명하기 위해 가상세계 퍼포먼스 '에란겔: 다크투어'(2021)를 시도했다. 최후의 1인만 살아남는 인기 슈팅 게임 배틀그라운드에 수십 명의 플레이어가 모여 누구도 총을 쏘지 않고 게임 곳곳의 풍경과 자연, 이야기를 즐기는 낯선 여행을 꾀한 것이다. 죽음의 명령에 저항하는, 해방된 플레이어가 전혀 다른 태도와 관점으로 놀이의 시공간을 전유하는 실험이었다.
가상공간에 무기가 가득하니 평화의 산책과 휴식을 꾀하는 건 무모하다 싶었지만 투어를 마칠 때까지 아무도 다른 이를 죽이지 않았고 우리는 세계의 종말을 춤추며 맞을 수 있었다.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지만 스스로 받아들인 규칙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지,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의 기분도 궁금했다는 후기는 기획 의도를 충족시키는 화답이었다. '에란겔: 다크 투어'는 내게 전쟁과 평화의 날을 결정하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이고 지키려 애쓰는 규칙에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또 투어를 계기로 한 문장 형식에 대한 내 불편함도 완화되었다. 한 문장을 피하기보다 N개의 한 문장을 계속 모으는 게 낫다는 판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2년 전, 명령 말고 규칙을 따르는 실험 덕분에 시작된 변화를 기념하며 오늘의 한 문장을 독자에게 공개한다. '게임은 결국 플레이어다'.
[권보연 인터랙티브 스토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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