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노 6세 교회 개혁과 한국의 교권회복 [역사 브런치]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많은 흉악한 일들이 바로 이 교황 보좌에서 발생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 문제의 남용, 하느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 등 모든 문제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질병이 머리에서부터 각 지체로, 교황에서 고위성직자들로 번졌음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고위성직자들 및 우리 모든 성직자들은 올바른 정도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한스 큉, 카톨릭의 역사>.” 1522년 하드리아노6세 교황이 뉘른베르크 의회에 전달한 죄에 대한 고백문으로, 당시 교회의 혼란에 교황청이 책임이 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로마교회의 통렬한 반성문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부유했다. 아시아에서 오는 모든 상품이 이탈리아배로 실려 와서 프랑스와 독일로 전파되었다.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부로 예술과 문학에 투자할 수 있었고 인간의 지식이 늘어났다. 부는 인간의 타락을, 지식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아테네 말기의 소피스트들처럼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도 불신앙을 초래하고 있었고, 마키아벨리 등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타락한 기존종교를 비판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갔다.
하드리아노 6세 교황은 1459년 3월 2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뱅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1497년에 총장이 되었으며, 신학자이자 교회 행정가로서 주위의 신망을 얻었던 것 같다. 1507년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의해 손자인 카를 5세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으며, 카를 5세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운명도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515년에 카를 5세의 왕위 계승을 보장받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서, 1517년까지 히메네스 추기경과 합께 공동섭정을 했다. 또 1517년에는 카를5세의 요청으로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520년부터 1522년까지 스페인총독으로 봉직했다<나무위키>. 카를 5세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으면 이런 일을 맡을 수 없다. 레오 10세의 사망 후, 추기경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교황으로 선출해서 독일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위협에서 로마를 구하려 했는지 모른다.
새 교황은 청렴했고 성직자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선출 당시 로마 사정에 어두워서 숙소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고민했다는 일화도 있고, 오랫동안 집안일을 해준 늙은 여종 하나만 데리고 와서 로마 시민들을 놀라게 했으며, 창백하고 야윈 모습이 사람들의 존경심을 자아냈다고 한다<나무위키>. 1159년 하드리아노 4세이후 처음으로 북유럽 출신(네덜란드)이었고, 교회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교황이었다. 신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북유럽 사람을 선택해서 교회개혁을 시도하려했는지 모른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증언한다. 개혁의 성공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하고, 적어도 상당수 구성원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황은 개혁을 추진할 어떠한 지지자도 확보하지 못했다.
인기가 없으면 개혁의 추진이 힘든데, 교황은 인기가 없었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것이 큰 이유였다. 당시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스스로 최고의 문명인이라 생각했고, 북유럽 발음의 라틴어를 구사하는 교황을 야만인이라며 경멸했다. 게다가 시인과 예술가를 내쫓고 고대의 유물을 이교도의 것이라며 내팽개쳐서 당시 여론을 주도하던 인문주의자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그렇다고 하드리아노 교황이 종교개혁가인 루터의 의견에 공감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루터가 지적한 교회의 부패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루터의 교리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독일 제후들이 무지와 정치투쟁 때문에 신교리가 확산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GF 영, 메디치이야기 P345>. 그러다 보니 개신교 개혁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안지 못했다.
하드리아노 교황이 르네상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지만, 로마가 신앙심 깊은 교황을 견디지 못한 것은 더 큰 범죄였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2>. 로마 사람들이 하드리아노 교황과 힘을 합쳐 교회의 개혁을 이룩했다면 이탈리아가 그렇게 침몰하지 않았을 것이란 실없는 생각을 해 본다. 개혁의 기회를 놓친 로마는 의인 10명이 없어 몰락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운명(사코디 로마)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수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고 애도했다. 교실내 스승의 권위가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신 선생님은 많은 선생님들을 대신해서 살신성인한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공감을 하고 있는 이때에 교권회복을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했으면 한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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