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리아노 6세 교회 개혁과 한국의 교권회복 [역사 브런치]

2023. 8. 24.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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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많은 흉악한 일들이 바로 이 교황 보좌에서 발생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적 문제의 남용, 하느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 등 모든 문제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질병이 머리에서부터 각 지체로, 교황에서 고위성직자들로 번졌음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고위성직자들 및 우리 모든 성직자들은 올바른 정도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한스 큉, 카톨릭의 역사>.” 1522년 하드리아노6세 교황이 뉘른베르크 의회에 전달한 죄에 대한 고백문으로, 당시 교회의 혼란에 교황청이 책임이 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로마교회의 통렬한 반성문이었다.

르네상스 성직자들의 타락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과 고위성직자들은 흠결이 많았다. 성직자라기 보다는 정치인이었고, 대부분 자식을 두고 있었으며, 사치스런 생활과 권력유지를 위해 족벌정치를 일삼았다. 사치와 전쟁을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성직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돈과 힘이 있으면 어린애도 고위성직자로 임명될 수 있었다. 레오 10세는 13세에 추기경이 되고, 사보이공 아마데우스8세는 8살에 주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에 대해 둔감했던 것 같고, 성직자들의 일탈행위를 서로 용서해주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부유했다. 아시아에서 오는 모든 상품이 이탈리아배로 실려 와서 프랑스와 독일로 전파되었다.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부로 예술과 문학에 투자할 수 있었고 인간의 지식이 늘어났다. 부는 인간의 타락을, 지식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만들어냈다. 아테네 말기의 소피스트들처럼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도 불신앙을 초래하고 있었고, 마키아벨리 등 이탈리아의 지식인들은 타락한 기존종교를 비판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갔다.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불신앙
1500년경 이탈리아의 많은 지식인들은 신앙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은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이 교황의 사면을 받았으며, 그리스도가 신이 아니고 요셉의 아들이었으며 정상적인 방식으로 임신했다고 말했는데도 종교재판을 비껴났다<윌듀런트 문명이야기5-2, p313>. 돈과 권력이 종교재판을 피할 수 있게 했는지 모른다. 천당과 지옥이란 상벌이 힘을 잃어버리자 도덕규범과 금도가 무너지고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선해지기 보다는 강해지기를 원했다. 마키아벨리도 “이탈리아가 다른 모든 나라들 보다 부패했다. 다음이 프랑스, 그 다음이 스페인이다”라고 말했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2 p359>.
북유럽의 높은 도덕성
그러나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달랐다. 14세기와 15세기 독일과 영국은 가난했지만 이탈리아처럼 부도덕하지 않았다. 북유럽 사람들의 눈에 로마는 소돔과 고모라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으로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에 경종을 울리고, 루터가 면죄부에 반대하며 만인제사장설 등으로 기존 교리에 반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드리아노 교황도 북유럽(네덜란드)출신이었다. 그도 진정으로 로마의 타락을 개탄했다. 그런 마음의 결실이 교황의 고백문이라 생각된다.

하드리아노 6세 교황은 1459년 3월 2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뱅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1497년에 총장이 되었으며, 신학자이자 교회 행정가로서 주위의 신망을 얻었던 것 같다. 1507년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의해 손자인 카를 5세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으며, 카를 5세의 성장과 더불어 그의 운명도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1515년에 카를 5세의 왕위 계승을 보장받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서, 1517년까지 히메네스 추기경과 합께 공동섭정을 했다. 또 1517년에는 카를5세의 요청으로 추기경에 임명되었고 1520년부터 1522년까지 스페인총독으로 봉직했다<나무위키>. 카를 5세의 절대적인 신임이 없으면 이런 일을 맡을 수 없다. 레오 10세의 사망 후, 추기경들은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교황으로 선출해서 독일 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위협에서 로마를 구하려 했는지 모른다.

새 교황은 청렴했고 성직자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선출 당시 로마 사정에 어두워서 숙소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고민했다는 일화도 있고, 오랫동안 집안일을 해준 늙은 여종 하나만 데리고 와서 로마 시민들을 놀라게 했으며, 창백하고 야윈 모습이 사람들의 존경심을 자아냈다고 한다<나무위키>. 1159년 하드리아노 4세이후 처음으로 북유럽 출신(네덜란드)이었고, 교회개혁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교황이었다. 신은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북유럽 사람을 선택해서 교회개혁을 시도하려했는지 모른다.

교황의 개혁추진
교황은 레오교황시절에 망가진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레오 주변에 있던 시인 음악가 예술가들을 모두 내 쫓으며, 바티칸 방들의 장식을 중지 시켰다. 레오시절 100명이나 되던 마부를 4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뇌물을 받거나 공금을 횡령하면 무거운 형벌을 부과했다. 더 나아가 지역교구를 떠나서 로마에 머물고 있던 주교들을 자기 교구로 돌려보냈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5-2>.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증언한다. 개혁의 성공은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하고, 적어도 상당수 구성원의 적극적인 지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교황은 개혁을 추진할 어떠한 지지자도 확보하지 못했다.

개혁의 동반자 규합에 실패
개혁의 속도가 너무 빨랐지 않나 생각된다. 개혁은 우선순위를 정하고 여러 단계로 나누어, 상황이 성숙할 때를 기다려 추진해도 힘들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교황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시행하고 지시했다. 측근이 앞장서서 개혁을 주창하고 교황이 그 개혁내용을 추인하는 흔한 방식도 사용하지 않았다. 레오교황이 성직을 매수한 사람들과 약정한 연금계약을 무효로 함으로써, 관직을 산 2550명의 사람들은 사실상 투자금을 잃어버렸다. 그들의 원성이 로마에 가득 찼고 교황을 암살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관직매입에 대해 연금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전임교황 때의 일이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개혁에 대한 반대세력만 늘린 것 같다.

인기가 없으면 개혁의 추진이 힘든데, 교황은 인기가 없었다.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것이 큰 이유였다. 당시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스스로 최고의 문명인이라 생각했고, 북유럽 발음의 라틴어를 구사하는 교황을 야만인이라며 경멸했다. 게다가 시인과 예술가를 내쫓고 고대의 유물을 이교도의 것이라며 내팽개쳐서 당시 여론을 주도하던 인문주의자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그렇다고 하드리아노 교황이 종교개혁가인 루터의 의견에 공감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루터가 지적한 교회의 부패를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루터의 교리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한 독일 제후들이 무지와 정치투쟁 때문에 신교리가 확산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GF 영, 메디치이야기 P345>. 그러다 보니 개신교 개혁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안지 못했다.

로마사람들의 타락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는 그렇게 유능했던 사람이 왜 여기 로마에서는 그 실력이 발휘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문화적 차이가 컸던 것 같다. 북유럽에서 명백히 타락으로 여겼던 일들에 로마 사람들은 무감각했다. 교황은 교회개혁이 힘든 이유가 교황권의 남용 때문이며 교황의 절대적인 권리를 제약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이는 로마의 이익과 배치되었다. 로마는 교황의 절대권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먹고 살았다. 로마사람들은 면죄부든 성직매매든 도덕성에 구애 받지 않고 돈을 벌어 오는 교황을 원했다. 당연히 로마를 먹여 살리지 못하는 현 교황이 빨리 죽기만을 기다렸다. 하드리아노 교황도 “한 인간의 능력이란 얼마나 많이 그 시대에 달려 있는 가!”<윌 듀런트, 문명이야기5-2>라고 하며 개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교황의 죽음과 로마의 몰락
게다가 국제정세도 그를 괴롭혔다. 요한기사단이 지키고 있던 로도스섬이 6개월의 공방 끝에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점령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군주에게 내부 전쟁을 그만두고 터키의 공세를 막자고 주장했지만 허사였다. 몸과 마음이 다 무너진 교황은 재위 20개월 만에 병이 들어 죽었다. 독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드리아노 교황이 르네상스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었지만, 로마가 신앙심 깊은 교황을 견디지 못한 것은 더 큰 범죄였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2>. 로마 사람들이 하드리아노 교황과 힘을 합쳐 교회의 개혁을 이룩했다면 이탈리아가 그렇게 침몰하지 않았을 것이란 실없는 생각을 해 본다. 개혁의 기회를 놓친 로마는 의인 10명이 없어 몰락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 운명(사코디 로마)을 경험하게 된다.

신속한 교권회복 대책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란 말이 있다. 개혁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기득권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구성원들의 개혁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하드리아노 교황의 개혁실패는 로마사람들의 공감대 부족에 있었던 것 같다.

최근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수많은 선생님들이 공감하고 애도했다. 교실내 스승의 권위가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돌아가신 선생님은 많은 선생님들을 대신해서 살신성인한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공감을 하고 있는 이때에 교권회복을 위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했으면 한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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