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인 등산로”···‘구조적 성차별 없다’는 정부, 여성의 죽음 막지 못했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동네 공원을 걷고, 숲길을 걷고, 출근을 하며 일상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것처럼요.”
24일 검은 옷을 입은 시민들이 여느 동네의 뒷산과 다르지 않은 관악구의 한 둘레길에 모였다. 지난 17일 이 길을 통해 출근하다 폭행 및 성폭행 피해를 입고 끝내 숨진 A씨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오전 10시라는 이른 시간임에도 시민 150여 명이 자리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한국여성의전화 등 91개 여성인권시민단체가 공동주최한 ‘공원 여성살해 사건 피해자 추모 및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 긴급행동’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되풀이되는 여성폭력의 굴레를 끊으려면 정부가 구조적 성차별을 인정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헸다.
A씨와 생활체육 축구회에서 활동했던 동료 7명이 둘레길 초입에서 추도사를 했다. 한 팀원은 “해맑고, 예뻤고, 착했던 친구였다”며 “아까운 이 친구를 위해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다른 팀원은 “6년 넘게 몸을 부딪히며 함께 울고 웃었던 동생”이라며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이 친구를 위해 끝까지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했다.
시민들은 줄지어 등산로를 굽이굽이 올랐다. 김하은씨(32)는 “걸어오면서 너무나 안전해 보이는 일상공간이고,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 생각이 많아졌다”며 “반복되는 죽음에 분노도, 슬픔도, 무기력도 느끼지만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20분쯤 올라간 이들은 A씨가 변을 당한 장소에 멈춰 묵념했다. 축구회원들은 주저앉아 흐느끼기도 했다. ‘항상 행복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등이 적힌 편지가 나무에 걸려 있었다.
묵념을 마친 시민들은 다시 둘레길을 내려와 ‘성평등해야 안전하다’ ‘여성폭력 방치 국가 규탄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신림역까지 행진했다. 이들은 행진하면서 “혼자라도, 숲길에도, 집앞에서, 직장에서, 어디서든 누구나 괜찮은 세상”을 외쳤다. “장갑차와 호신용품이 아닌 성평등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들은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금천구 교제폭력 보복살인 사건에 이어 이번 사건까지, 반복되는 여성폭력 사건은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했다.
행진을 마치고 낮 12시 신림역 2번 출구앞 정리집회에서 이은지씨는 “신림동에 사는 친한 동생이 ‘외출하기 불안하다’는 말에 그저 ‘나도 무섭다. 조심해야겠다’는 답답하고 무력한 말밖에 할 수 없었다”며 “여성의 일상에 스며든지 오래인 공포와 불안은 개인이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국가가 해결할 문제”라고 했다.
이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현 정부의 기조에 따라 성평등 정책이 지속적으로 축소됐고, 결국 또 다른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내놓은 폐쇄회로(CC)TV 설치 확대, 흉악범을 수용하기 위한 교도소 증설, 의무경찰제 도입 등 대책은 미봉책일 뿐이라고 했다. 최란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는 “국가가 내놓는 치안 정책은 일반시민의 일상을 통제하는 방향”이라며 “‘옆 시민이 나에게 해를 입힐 수 있다’는 생각을 국가가 치안 정책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했다.
이들은 구조적 성차별을 인정하고 젠더폭력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성평등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들은 “정부가 성평등 정책을 축소하고, 폐지하고 엉뚱한 대책만을 내놓는다면 또 다른 죽음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여성안심귀갓길 예산을 삭감한 관악구의회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김남영 진보당 인권위원장은 “여성에 기생하는 정치, 여성 살해를 묵인하는 국가를 바꾸기 위해 끝까지 연대하겠다”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고인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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