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라심포지엄] 상온에서 작동하고 연결도 쉬운 ‘광자’… 양자컴퓨터 다크호스로 부상
광 기반 양자컴퓨팅 해외 기업·연구자 한 자리에
광 기반은 초전도보다 저렴하고 오류 정정에 강점
KIST·KISTI 융합연구단 만들어 핵심 기술 확보 도전
양자컴퓨터는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과학기술 분야 중 하나다. 구글과 IBM 같은 빅테크 기업이 수천억원을 투자하고 있고,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 같은 기술 선도국들도 저마다의 정책을 세우고 관련 산업과 인력을 키우고 있다. 한국도 지난 6월 양자과학기술 전략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투자를 선언했다. 내년도 국가 주요 연구개발(R&D) 예산이 14% 삭감되는 와중에도 양자 분야에 대한 R&D 투자는 20% 증가했다.
양자컴퓨터는 흔히 슈퍼컴퓨터보다 1000만배 빠른 계산이 가능한 ‘꿈의 컴퓨터’로 불린다.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양자컴퓨터를 모든 문제를 풀어주는 ‘만능 키’처럼 여기는 건 잘못된 접근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양자컴퓨터가 상용화가 된다면 신약 개발이나 신소재 등 특정 분야에서는 획기적인 발전을 이끌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물론 양자컴퓨터는 아직 기술 개발의 초기 단계다. 상용화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어떤 방식으로 양자컴퓨터를 구현할 지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하다. 초전도, 이온 트랩, 반도체, 중성원자, 광자 등 여러 방식이 백가쟁명식으로 경쟁하고 있다. 국내에선 초전도와 중성원자 방식의 기술 개발에 정부가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초전도는 구글, IBM 같은 빅테크 기업이 기술 개발에 나선 방식이고, 중성원자는 국내의 기술 완성도가 높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하지만 최근 양자컴퓨터 개발의 최전선인 유럽과 미국에선 광자를 이용한 광 기반 양자컴퓨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광 기반 양자컴퓨팅을 이끄는 건 기업들이다. 미국의 싸이퀀텀(psiquantum)은 마이크로소프트의 투자를 받으며 기업가치가 2021년 기준으로 이미 4조원을 넘어섰고, 캐나다의 자나두(Xanadu) 역시 기업가치가 1조원을 넘는다. 영국의 오르카 컴퓨팅(ORCA computing)과 프랑스의 콴델라(Quandela) 등 유럽에서도 광 기반 양자컴퓨팅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초전도와 중성원자에 집중하는 한국에서도 광 기반 양자컴퓨터 개발에 나서는 연구자들이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융합연구단을 꾸리고 광 기반 오류정정 양자컴퓨팅 기술 개발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광 기반 양자컴퓨팅을 연구하는 전 세계 연구자들이 한국에 모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23일부터 25일까지 강릉 분원에서 제18회 아슬라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의 주제가 ‘광 기반 양자컴퓨팅’이다. 아슬라 심포지엄은 신라시대 강릉 지역의 이름인 ‘아슬라’를 본 딴 것으로 해외 유명 학자를 초청해 도전적인 과학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는 자리다. 이번 포럼에는 조선비즈가 공식 미디어 후원사로 참여했다.
◇냉동고도 진공용기도 필요 없는 광자
양자컴퓨터는 말 그대로 양자(量子)를 이용한 컴퓨터를 말한다. 양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에너지의 최소량을 의미하는 단어다. 물질의 기본 구성 단위인 원자를 더 쪼개면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나눠지는데 이걸 모두 양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 세계는 고전역학과 다른 양자역학이라는 물리법칙이 지배한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다른 몇 가지 특성이 있는데 ‘중첩’이 그 중 하나다. 양자컴퓨터는 이 중첩을 이용해 연산 속도를 크게 높인 것이다.
기존의 컴퓨터는 전기가 통하면 1, 통하지 않으면 0으로 표기하는 2진법 구조의 ‘비트’로 구성돼 있다. 반면 양자컴퓨터는 0과 1의 상태가 중첩돼 있는 ‘큐비트’로 이뤄져 있다. 이 큐비트를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양자컴퓨팅 방식으로 나뉜다. 기존 컴퓨터의 트랜지스터를 생각하면 된다.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진공관을 활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컴퓨터의 초창기 시절에 트랜지스터와 진공관이 공존했던 것처럼 양자컴퓨터에서도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고 있는 셈이다.
가장 대표적인 양자컴퓨팅 방식은 초전도 회로(superconducting circuitry)와 이온 트랩(trapped ions)이다. 초전도 방식은 초전도 상태인 전기회로의 두 가지 상태로 큐비트를 표현하고, 이온 트랩은 양전하나 음전하를 띠는 원자인 이온을 활용해 큐비트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구글이나 IBM이 초전도 방식을 활용하고 있고, 이온 트랩 방식은 김정상 듀크대 교수가 공동대표로 있는 아이온큐(IONQ)가 선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방식은 상용화까지 걸림돌이 적지 않다. 초전도는 금속을 낮은 온도로 냉각하면 전기저항이 제로가 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초전도 양자컴퓨팅은 초전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영도인 영하 273도를 유지해야 한다. 조그마한 초전도 회로 칩을 위해 거대한 냉동고가 필요한 셈이다. 양자컴퓨터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큐비트의 수를 늘려야 하는데 초전도 방식에서는 덩달아 냉동고의 숫자도 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다 초전도 방식은 큐비트가 불안정하고 중첩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단점도 있다.
이온 트랩은 극저온은 필요하지 않지만, 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이온은 다른 원자나 분자와 충돌하며 담고 있는 정보가 깨진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진공 용기를 만들고 이온만을 담아야 한다.
이에 비해 광 기반 양자컴퓨팅은 거대한 냉동고나 복잡한 진공 용기가 필요없다. 빛의 기본 단위인 광자(photons)는 다루기가 쉽고 이미 광섬유로 인터넷 통신을 할 정도로 관련 기술이 발달해 있다. 영국의 양자컴퓨팅 회사인 오르카컴퓨팅의 최고과학책임자(CSO)인 조쉬 넌(Josh Nunn)은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광 기반으로 양자컴퓨터를 만들면 상온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냉동고에 넣을 필요가 없어 확장에 용이하다”며 “광학 파이버(섬유)를 통해 다른 양자컴퓨터와 모듈 형식으로 연결하는 식으로 확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양자컴퓨팅 회사인 자나두의 최고과학책임자인 기욤 도피네(Guillaume Dauphinais)는 양자컴퓨팅 상용화의 최대 과제인 ‘오류 정정’에서 광 기반 양자컴퓨터가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자컴퓨터로 유용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큐비트에 많은 수의 연산을 적용해야 하는데 양자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오류가 누적되게 된다”며 “이런 오류를 정정하는 건 양자컴퓨터에서 필수인데 광자를 이용하면 광범위한 연결이 가능해지면서 구조를 유지하는게 쉽고, 오류를 정정하는 것도 유연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을 기획한 KIST 양자정보연구단 이승우 책임연구원은 상온에서 작동할 수 있고, 오류 정정에 유리하다는 점은 향후 양자컴퓨팅 상용화를 위한 경쟁에서 광 기반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이 책임연구원은 “광자를 이용한 방식의 장점이 최근에 조명받으면서 북미나 유럽 쪽에서는 광 기반 양자컴퓨터가 메이저로 부상했다”며 “한국은 양자 분야의 전문 인력이 부족한 편인데, 광자는 연구 수준이나 인력이 충분하기 때문에 광자를 활용한 양자컴퓨팅 개발에 나서면 다른 방식보다 인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유리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양자컴퓨팅 기술 개발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는 류훈 KISTI 책임연구원도 “오류 정정이 되지 않는 양자컴퓨터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광 기반 양자컴퓨팅이 오류 정정 측면에서 강점이 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아직 정답은 없어… 다양한 방식 모두 가져가야”
지난 6월 2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양자컴퓨팅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석학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구글의 양자컴퓨팅 개발을 총괄한 존 마르티니스 교수를 비롯해 찰스 베넷 IBM연구소 연구위원, 김정상 미국 듀크대 교수, 김명식 영국 임페리어칼리지(ICL) 교수가 단상에 섰다. 윤석열 대통령이 2035년까지 양자 과학기술 분야에 최소 3조원을 투자하겠다는 발표를 한 직후였다.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석학들에게는 한국 정부가 발표한 양자과학기술 전략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2035년까지 1000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도 있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석학들은 자신들은 점쟁이가 아니라며 정부 정책에 대한 평가에는 말을 아꼈다. 대신 이들은 양자컴퓨팅 방식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초전도와 이온 트랩, 광 기반의 양자컴퓨팅 가운데 어떤 방식이 앞서고 있는지 서로의 의견을 묻고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초전도 방식의 양자컴퓨팅을 개발하고 있는 마르티니스 교수가 초전도 양자컴퓨팅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해 설명하면 이온 트랩 방식의 양자컴퓨팅을 개발하고 있는 김정상 교수는 극저온 상태가 필요없는 이온 트랩 방식의 장점을 설파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석학들 사이의 대화를 정리한 건 찰스 베넷 연구위원이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컴퓨터에도 다양한 방식의 메모리가 사용되는 걸 언급하며 양자컴퓨터도 다양한 방식을 하이브리드처럼 쓸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마르티니스 교수는 광자를 이용하면 서로 다른 방식의 양자컴퓨터를 연결하는 하이브리드가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들은 양자컴퓨터에선 아직 정답이 없다며 다양한 방식을 모두 실험해보고 직접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마르티니스 교수는 “어떤 방식이 최고인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며 “모든 방식마다 장애물과 기술적인 장벽이 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 중요한 건 이런 다양한 방식에 대해 연구개발을 진행하면서 직접 테스트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를 한 싱가포르의 양자컴퓨터 전문가 퀙 릉 추안(Kwek Leong Chuan)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도 “양자컴퓨터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자금이 허락하는 한 다양한 기술에 모두 투자하는 게 중요하다”며”광자와 초전도 방식 모두 기술적으로 성숙하고 있기 때문에 양쪽에 모두 투자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광 기반 양자컴퓨터 위해 출연연이 힘 모았다
한국에도 광 기반 양자컴퓨터 기술 개발에 나선 연구자들이 있다. KIST 양자정보연구단을 중심으로 KISTI와 한국표준연구원이 힘을 모아 융합연구단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융합연구단은 NST가 2014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연구 사업이다. 대형 연구성과 창출을 위해 여러 연구기관에 소속된 연구자들이 주관연구기관에 모여 연구하게 된다.
KIST와 KISTI, 표준연은 융합연구단 설립을 위해 NST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국가과학기술심의회의 심사까지 마쳤다. 융합연구단 출범은 올해 말쯤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융합연구단 설립을 이끌고 있는 이승우 KIST 책임연구원은 “싸이퀀텀이나 자나두 같은 양자컴퓨팅 기업들이 10년 뒤쯤에는 오류 정정을 갖춘 광 기반 양자컴퓨팅 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다. 한국도 세계적인 추세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미리 오류 정정을 할 수 있는 광 기반 양자컴퓨팅의 핵심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며 “융합연구단을 꾸려서 국내 전문 인력을 한 곳에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연구자나 기업과 협력을 해 나가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융합연구단이 출범하게 되면 2024년부터 2032년까지 9년에 걸쳐 활동하게 된다. 첫 3년은 광기반 양자 오류 정정 기술을 연구하고, 2단계인 2027년부터 2029년까지는 실제로 광기반 논리 큐비트를 구현할 기술 개발에 나선다. 마지막 단계인 2030년부터 2032년까지는 실제 양자컴퓨팅을 구현할 아키텍처와 알고리즘을 만들게 된다.
이 책임연구원과 함께 융합연구단을 준비하고 있는 류훈 KISTI 책임연구원은 “큐비트의 개수만 늘려서는 유의미한 양자컴퓨터를 만들 수 없다. 실제로 어플리케이션을 작동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류 정정을 적용한 양자컴퓨터가 필요하고, 광 기반이 그 부분에서 강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류 책임연구원은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광 기반 양자컴퓨팅을 연구하는 전 세계 기업과 연구자가 한 자리에 모였다”며 “융합연구단이 출범하면 광 기반 양자컴퓨팅 개발을 위한 국제적인 연구 협력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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