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고진, 반란 후 두 달간 ‘데드 맨 워킹’? “푸틴, 때를 기다렸다”

선명수 기자 2023. 8. 2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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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실패 두 달만에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
푸틴에 ‘굴욕’ 안긴 프리고진, 암살 추측 무성
“푸틴은 복수의 화신, 때를 기다렸다” 분석
내년 대선 앞두고 ‘엘리트층에 경고’ 해석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23일(현지시간) 러시아 쿠르스크 지역에서 열린 ‘쿠르스크 전투’ 승전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러시아대통령공보실/타스연합뉴스

러시아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던 민간군사기업(PMC)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반란 2개월 만인 23일(현지시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러시아 당국은 사고 원인 조사를 시작했다고 밝혔으나, 비행기 추락을 ‘단순 사고’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정적들을 제거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프리고진 암살을 명령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아직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은 여전히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절대 권력 ‘차르’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모스크바 진격까지 시도했던 ‘반란 수괴’ 프리고진을 숙청할 것이란 관측은 반란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그러나 프리고진은 예상을 깨고 지난 두 달여간 러시아 안팎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모습을 보여 혼란을 증폭시켰다.

반란을 중단하고 벨라루스로 망명하는 것을 조건으로 신변 보장 약속을 받아낸 그는 반란 종식 닷새 만에 바그너 지휘부와 함께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났다. 프리고진은 바그너 그룹 본사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차례 드나드는 모습이 포착됐고, 지난달 말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담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밖에도 프리고진은 니제르 군사 쿠데타 지지 성명을 내는가 하면, 불과 이틀 전에는 아프리카에서 활동할 용병을 모집한다고 발표하는 등 최근 들어 공개 행보를 늘려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바그너 그룹의 역할이 축소된 후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한 시도로 읽혔다.

21일(현지시간) 텔레그램 채널에 공개된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마지막 영상. 프리고진은 이 영상에서 아프리카에서 활동할 바그너 용병을 모집한다고 밝혔다. AP연합뉴스

무장 반란 이후에도 계속된 그의 공개 행보를 두고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지난달 한 포럼에서 “푸틴에게 복수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푸틴은 복수의 사도”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한 때 푸틴의 ‘최측근’에서 그에게 칼을 꽂은 ‘반역자’가 된 프리고진은 결국 반란 2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됐다. 군사 쿠데타로 푸틴 대통령에게 전례 없는 ‘굴욕’을 안긴 그가 결국 숙청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모스크바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온 프리고진의 반란으로 많은 이들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정권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이는 푸틴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 유라시아그룹의 설립자인 이안 브레머는 “프리고진과 크렘린의 (반란 종식) 협상이 타결됐을 때부터 그가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란 점은 꽤 분명했다”고 BBC에 말했다. 그는 지난 6월 반란 당시에도 프리고진을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에 빗댄 바 있다. 이는 사형 집행을 앞둔 사형수가 형장으로 이동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곧 죽을 운명이라는 의미다.

브레머는 “프리고진이 실제로 숙청당했다면 이는 푸틴이 얼마나 극도로 계산된 인물인지 보여주는 것”이라며 “그는 프리고진이 두 달 동안 활보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시간을 갖고 프리고진이 훨씬 취약한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는 러시아에서 푸틴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매우 소름 끼치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센터의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선임 연구원은 “프리고진은 반란 이후 한동안 러시아 내부에서 바그너 그룹을 잡음 없이 해산시키기 위해 필요했다”며 “그러나 그의 존재는 여전히 푸틴에게 ‘정치적 굴욕’이었고 ‘위협의 원천’이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당국은 2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 트베르 지역에서 민간 항공기가 추락했다며 현장 사진을 공개했다. 러시아 당국은 바그너 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을 포함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조사위원회/신화연합뉴스

영국의 정보 당국자들은 이번 비행기 추락을 푸틴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한 정보기관 관계자는 “당연히 푸틴이 (암살을) 명령했을 것이다. 우두머리로서 푸틴은 그가 당했던 굴욕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면서 “모든 상황과 배경, 과거 사례들이 FSB를 지목하고 있다. FSB는 여전히 푸틴에게 충성한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활동했던 영국 정보요원 존 포맨도 “(프리고진의 사망은) 일종의 러시아 식 오페라”라며 “(러시아 정부가) 두 달여간 사전 준비를 해왔다는 점에서 그 시스템의 속도가 놀랍다”고 말했다. 바그너 그룹과 연계된 텔레그램 채널인 ‘그레이 존’도 프리고진이 탄 비행기가 러시아군에 의해 격추됐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고가 내년 3월에 열릴 러시아 대선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인 미하일로 포돌랴크는 “무장 반란 두 달만에 프리고진을 공개적으로 제거한 것은 2024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이 러시아 엘리트층에게 보내는 신호”라며 “‘조심해, 배신은 곧 죽음이야’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크렘린궁과 가까운 일부 분석가는 프리고진의 죽음에 우크라이나가 개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친크렘린 정치분석가인 세르게이 마리코프는 “프리고진이 살해됐다면 아마도 우크라이나가 조작한 공격이었을 것”이라며 “푸틴이 그를 숙청하는 것을 원했다면 그냥 체포했을 것이다. (비행기를 추락시켜)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러시아 언론들은 대체로 프리고진의 사망 소식을 단신으로 짧게 전하고 있다. 대신 관영 매체들은 푸틴 대통령이 나치 독일에 맞서 소련이 승전한 ‘쿠르스크 전투’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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