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조의 아트홀릭] "오갈 데 없는 삶을 지탱해 준 건 버려진 낡은 가방이었죠"
■ 글 : 정승조 아나운서 ■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설치 미술가인 차민영(1977). 그녀와의 인연은 국립현대미술관(청주)의 전시에서부터였다. 당시의 전시작인 '토포필리아의 무대(2017)'는 강렬함 그 자체였다. 가방 속에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들의 삶을 촘촘히 쌓으며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 느껴졌달까. 이처럼 가방을 통해 독특한 시선으로 동시대를 담아내는 그녀의 개인전 'SHAKE-UP'이 화제다. 정승조의 아트홀릭은 최근 작가 차민영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Q 정승조의 아트홀릭 독자들께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가방 세포(suitcase cells)'를 배양하는 작가 차민영입니다.
Q '가방 세포'를 배양한다는 말이 참 인상적인데요.
저는 고착화되는 걸 경계해요. 20년간 작품 활동하면서 '가방'이란 오브제가 주는 영향이 강해요. 물론 저는 사진과 그림,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작업도 해 왔고요. 사람들은 저를 미디어 아티스트나 설치미술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작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거든요. 여러 가지 매체로 작업을 풀어내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세포'라는 것은 어떻게 발현이 될지 모르는 미결정의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저를 표현하는 키워드로 '가방 세포를 배양하는 작가'는 어떨까 생각했죠.
Q 작가 차민영에게 가방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궁금해요.
사실 가방으로 작업하기 전까진 줄곧 평면 작업을 해왔어요. 저는 6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거든요. 꿈이 어떻게 보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어요. 저는 그림을 계속 그릴 줄 알았어요. 대학에 와서도 그림을 그렸고요. 이런 이유로 늘 종이와 캔버스가 작업의 시작점이었어요. 주변 동기들도 이를 바탕으로 고군분투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문득 종이와 캔버스가 온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종이도 캔버스도 결국 오랜 시간 학습하고 교육받은 타성에 젖은 지지체 중 일부였으니까요. 이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죠.
Q 그럼 그 고민의 결과가 가방이었나요?
우연한 계기였어요. 어찌 보면 가방은 제 홀로서기와 경제적인 독립 시기와 맞물려 있는데요.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반지하 방을 전전하던 당시 월세(서울)가 폭등했어요. 오갈 데가 없는 상황이었죠. 삶의 버거움과 세상의 냉혹함이 체감되는 순간이었달까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분리수거장에서 시커멓고 커다란 낡은 여행 가방을 보았어요. 무심히 그 가방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그리고는 무언가에 홀린 듯 가방을 자취방으로 들고 왔어요. 그렇게 저만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넣은 첫 가방 작품이 탄생했고요. 이때부터 가방은 저만의 특별한 지지체가 됐어요. 그야말로 삶의 지지체가 된 거죠.
Q 그래서 탄생한 첫 작품이 '자전거를 타고 탈출하는 방법(2003)'이군요.
'자전거를 타고 탈출하는 방법'은 2003년도에 완성했고 전시는 2005년에 이뤄졌어요. 사실 당시의 제 보금자리는 방이 아닌 작업실을 만든 거였어요. 작업실이 없었기에 자취방에서 작업도 하고 먹고 자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탈출하는 방법'은 제 작업실을 미니어처로 만든 공간이에요.
Q 흥미롭네요. 어떤 메시지를 담은 작업인가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가방 속 공간은 이래요. 사람은 없고요. 누군가가 이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어요. 자전거를 수리해서 무언가 바깥으로 탈출하고 싶었나 봐요. 가방 바깥의 모니터는 창이고요. 그 창을 통해 보이는 바깥 풍경은 바닷속이에요. 결국 이 주인공은 자전거가 수리되어도 탈출할 수 없는 거죠. 한마디로 당시 제 상황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산 넘어 산이라고 하잖아요. 무언가를 해결해도 또 하나의 어려움에 부딪히는... 이런 삶의 힘든 과정을 담고 있는 작품이에요.
Q 그런데 작품은 단순히 암울한 상황만을 표현한 건 아니라면서요.
그렇죠. 당시 개인적으로는 힘든 상황인 건 맞지만 사실 가방이라는 것 자체가 '가동'의 의미가 있잖아요.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으니까요. 저는 '자전거를 타고 탈출하는 방법(2003)'을 통해 희망의 실마리나 희망의 암시를 담고 싶었어요.
Q 이제부턴 현재 진행 중인 '차민영 개인전 SHAKE-UP'에 관한 이야기로 가보죠.
전시 명이 'SHAKE-UP'이에요. 전시의 의도는 여기에 모두 담겼어요. 한마디로 고착화된 것들을 뒤흔들어 보고 싶었거든요. 예를 들어 예술을 생산하는 주체와 객체의 뒤섞임, 시선의 뒤섞임, 작품의 내부 공간과 갤러리 공간의 뒤섞임 같은.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기존의 고착화된 주ᆞ객체의 위치와 관람 방식 등을 뒤섞이게 하려는 의도에 주안점을 두었죠.
Q 고착화되어 굳어진 걸 뒤흔들고 싶었던 터닝포인트가 있었나요.
이유는 분명해요. 전 작업을 하며 끊임없이 변형을 추구해 왔어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딱 한 가지가 있었죠. 바로 제가 만든 작품을 관람객이 '관조'하는 방식인데요. 그러니까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엄연히 주체와 객체라는 위치가 명확해요. 관조라는 것은 대상과 거리를 두고 있고요. 이 관조하는 방식을 '경험'과 '체험'으로 밀착시켜 뒤흔들고 싶더라고요.
Q 아이디어가 신선하네요. 그렇다면 관객은 작품에서 어떤 경험과 체험을 하게 되나요?
관객이 가방(작품) 안으로 걸어 들어가요. 그러면서 내부를 경험하고요. 동시에 작품을 생산하는, 그러니까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체로 그 위치가 달라져요. 더불어 가방 안에서 작품의 외부를 바라보게 하는 일종의 시선의 뒤바뀜이 발생하는데요. 이처럼 작품의 내부 공간과 외부의 전시 공간을 'SHAKE-UP'하는 겁니다. 또 가방 속에서 외부를 바라보던 주체는 가방 밖에서 또 다른 관람객의 피사체가 되겠죠? 이런 과정에 일어나는 다양한 '뒤섞임의 사건들' 자체가 이번 전시의 작업이에요.
Q 방금 말씀하신 걸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Giant suitcase cells(2023)'이죠?
맞아요. 이번 개인전의 메인 작품인데요. 'Giant suitcase cells'는 기존 작업을 재배치하고 'Shake Up' 하는 역할을 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착화 되어 굳어진 것을 뒤흔들게 되지요. 따라서 이번 전시의 구심점이 되는 작품이고요. 저에게는 애정이 더 가는 작품입니다.
Q 전시를 보면서 작품의 작업 과정이 궁금하더라고요.
작업은 다 조립식으로 이뤄져요. 조명도 갈아야 하고, 모니터도 갈아 넣을 수 있고, 모든 걸 다 분리할 수 있게 조립식으로 만들어요. 그래서 작품이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여지지 않는 부분에 할애하거든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이죠.
Q 주된 작업인 '입체 작업'에 관한 공부는 따로 더 하셨나요?
사실 입체적으로 무언가를 만들거나 배우진 않았어요. 계속 줄곧 그림만 그렸기 때문에. 그래서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스스로 찾아가면서 만든 작업이에요. 중간에 조소과를 가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저만의 개성을 찾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정말 독학하며 하나하나 만들어진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Q 그렇군요. 작업하며 예상치 못한 문제와 마주할 때도 있나요.
변형되는 게 많거든요. 사실 가방이 천편일률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가방 안의 내부는 다 달라요. 곡면이라든지, 내부 공간이라든지, 부속품이 붙는 부분 등 다른 점이 존재해요. 그래서 작업 때마다 매번 새로워요. 늘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고요. 늘 새 작업을 하는 느낌이랄까요. 재료도 계속 바꾸고요. 그래서 고민하는 시간도 꽤 길어요. 이렇게 새로운 구성과 재료로 작업을 하니 예상치 못한 난제들과 씨름하기 일쑤예요. 그래서 작품 제작을 위한 평균적인 소요 시간도 무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Q 가방은 직접 만드세요? 아니면 틈틈이 수집하나요?
'멜팅 프레임(Melting Frame)' 연작처럼 직접 제작하는 시리즈도 있지만 대부분 제가 수집해요. 주로 기성 가방을 사용하고요. 가방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감사하게도 지인들께서 선물로 주기도 하시고요. 가방 업체(쌤소나이트 코리아)에서 후원도 해 주세요. 이렇게 저는 작업실에 틈틈이 가방을 수집해둬요. 작가들의 작업실에 빈 캔버스와 종이가 준비된 것처럼요. 작업실에는 작업을 위한 가방들이 쌓여있어요.
Q 다시 최근 전시작 이야기로 가볼게요. 길게 연결된 가방에서는 벌 소리가 나더군요.
'Suitcase Chain'이란 작품인데요. 제게 각 가방들은 하나의 세계이자 개체예요. 이 모든 개체와 세계들이 연결된 환경에 우리가 살고 있고요. 어느 한 개체의 작은 변화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요. '연결망' 속에 있죠. 우리는 각 가방처럼 모두 행위자들이거든요. 미물이라고 생각하는 꿀벌이라는 개체가 지구에서 멸종하면 인간이라는 개체도 사라진다는 보고가 있어요. 그것처럼 행위자들의 연결망 속에서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위기와 징후를 담고 싶었어요. 기술의 가속화와 기후 위기처럼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을 통제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요.
Q 이외에도 토포필리아(Topophilia Series, 2017) 연작, 멜팅프레임(Melting Frame, 2022) 등을 보면서 "환경과 자본주의, 장소" 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느껴졌어요.
사실 당시 제가 작업을 처음할 때도 "아~ 이 도시에 내 몸 하나 누일 곳이 없는가"에 대한 고민이 컸어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어떻게 생성되었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기에 생기는 것인가. 이로 인해 느끼는 것들과 상실감은 저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제가 원래 장소에 대한 애착이 좀 있어요. 제가 나고 자란 고향 집은 30년간 마당을 끼고 있는 오래된 주택이었거든요. 그런데 재개발로 철거됐어요. 상실감이 컸죠. 이것이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저의 어릴 적 추억부터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경험을 해 봤어요. 현대의 공간들도 계속해서 재개발 등을 통해서 달라지고 있잖아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고민을 많이 했었고요. 사실 박사 논문도 그쪽으로 적었거든요. 그래서 장소학자나 지리학자들의 자료들을 자주 보면서 그것을 자기화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죠. 관심이 많은 분야들입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 궁금합니다.
오는 11월 대전(신세계 아트앤사이언스)에서 3인전이 있고요. 내년과 내후년 개인전도 잡혀있는데요. 잘 준비하고 싶고요. 고백하자면 사실은 제가 '가방 세포'라고 설정하기 전까지는 가방이나 다른 오브제에 담아내는 작업이 조금은 버겁기도 했어요. 약간 매너리즘에 빠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가방 세포'라고 설정하고 난 뒤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 마치 스스로 뭔가를 제어하고 다듬으려고 하지 말고 확 열게 된 계기였거든요.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조금 더 자유롭게 열어보자. 이것이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늘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작업 자체로 울림을 전달할 수 있는 작가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 차민영 개인전 Shake Up은 오는 9월 15일까지 서울 Gallery x2(갤러리 엑스투)에서 열린다. 관람료는 무료. 월요일 휴무
(사진 제공 : 작가 차민영, Gallery 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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