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 드리운 수직의 숲… 깊고 짙은 편백의 품에 안기다[박경일기자의 여행]
‘봄의 산’ 이라 불리는 일림산
여름 들머리엔 편백 군락 탄성
원형극장 같은 조형미에 압도
3년간 식초 발효 시키는 ‘초루’
오솔길 끝에 옹기 2000개 빼곡
조민석 설계한 건축물도 눈길
금화산밑 징광문화단지 차밭
산불 딛고 39.6만㎡ 일궈내
정원 산책 후에 시음도 묘미
간척사업으로 논이 된 ‘득량만’
이발소 등 레트로 공간 복원
강골마을선 한옥캠핑도 추진
보성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전남 보성에서 압도적인 건 차(茶)입니다. 보성에는 내로라하는 관광지가 된 차밭이 있고, 차 박물관도 있으며 차 체험장이 있습니다. ‘녹차 먹인 돼지’를 비롯해 녹차 김치, 녹차 라면까지 있을 정도니, 보성에는 차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차 말고는 뭐가 있을까요.
언제나 그렇습니다. 압도적인 건 다른 것들을 가립니다. 보성에는 차의 명성에 가려져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적잖습니다. 그런 곳들을 찾아봤습니다. 차를 제외한 ‘그 밖의 여러 가지’ 얘기지만, 매력이 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차를 빼고 여기만 다녀온대도 보성 여행에 아쉬움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뭐 굳이 차를 덜어낼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말하고 싶었던 건 보성에 가면 두루 보고 오자는 이야기입니다.
# 봄의 산을 여름에 가는 이유
보성에는 일림산이 있다. 인근의 제암산, 사자산과 함께 봄이면 정상과 능선 일대가 붉은 철쭉 군락으로 뒤덮이는 산이다. 철쭉으로 이름난 산이니 다들 봄의 모습만 안다. 그런데 그 산 발치에 미처 몰라본, 입이 딱 벌어지는 편백나무 숲이 있다. 남도에는 이름난 편백 숲이 하나둘이 아니다. 더 크고 더 촘촘한 편백 숲도 많다. 하지만 탄성과 함께 들어서는 숲은 흔하지 않다. 일림산 들머리의 편백 숲은 ‘탄성을 부르는’ 바로 그런 숲이다.
일림산의 편백 숲은 날씨가 다른 날에 두 번 갔다. 하루는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다른 날은 맑았다. 풍경과 운치는 비 오는 날이 단연 압승이다. 촉촉하게 젖은 나무와 그림자 없는 균질한 빛이 숲을 더 짙고 깊게 드러낸다. 여기다가 지난봄에 편백 숲 가운데 놓은 목제 계단이 젖으며 드러내는 조형미도 분위기에 한몫한다. 일림산 편백 숲의 들머리 지형은 숲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경사다. 마치 반을 자른 깔때기 모양의 지형이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 넘어 편백 숲을 마주하는 순간, 마치 원형극장의 무대에 선 듯한 느낌이 드는 건 그래서다. 하늘을 찌를 듯 자란 나무들이 마치 극장에 가득한 관객처럼 이쪽을 보는 듯한 느낌. 수직으로 장쾌하게 솟은 붉은 수피(樹皮) 나무들이 다들 여기를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한 발 한 발 들어갈수록 숲이 채우는 시야각이 넓어지며 탄성이 나온다.
편백 숲이란 관중에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인데 ‘압도된다’는 느낌은, 그리 기분 좋은 감정 상태가 아니다. 그런데 압도하는 상대가 자연이라면 사정은 다르다. 크거나 오래된 것 앞에서 인간은 한 줌도 안 되는 존재라고 느끼는 일. 그런 압도는 ‘감동’의 감정과 다르지 않다. ‘비 오는 날’ 일림산 편백 숲 안에서 느끼는 기분이 꼭 그렇다.
# 수직의 숲을 독차지하는 기분
염천의 더위만 아니라면, 일림산 등산을 권한다. 무더위가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요즘 같은 날씨에는 등산은 아니란 얘기다. 일림산 정상에 서면 득량만의 바다가 근사하게 펼쳐진다. 철쭉꽃 없이도 풍경은 훌륭하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골치재를 지난다. 골치재는 보성의 내륙에서 산 너머 장흥 수문 해변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일제강점기에 보성주민들은 공출미를 지게에 지고서 일림산 골치재를 넘어 장흥 수문포 바다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모은 쌀을 수문포에서 배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단다. 쌀가마를 지고 이 고개를 넘자면 얼마나 지옥 같았을까. 그때의 기억으로 보성사람들은 ‘골치 아픈 재’란 뜻에서 골치재라 이름 붙였다고 했다.
일림산은 철쭉으로 이름난 ‘봄의 산’이지만, 일림산 발치에는 여름에도 사람이 모여든다. 일림산 들머리 바깥에 보성강 발원지의 물길이 이룬 용추계곡이 있어서다. 일림산 골짜기에서 시작한 물이 암반 계류를 타고 내려와 용추폭포로 쏟아지는데, 암반의 와폭(臥瀑)인 용추폭포 아래쪽에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이 이어진다. 암반 계곡이 그늘 안에 있어 물놀이하기 좋다.
계곡이 좋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무심해서 그럴까. 행락객들은 계곡 바로 위 편백 숲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시야를 가득 채운 편백 숲이 이렇듯 생생한 초록으로 빛나고 있는데도 말이다. 웬만한 카페며 맛집도 줄 서서 대기해야 하는 세상에, 이렇게 근사한 편백 숲을 완전히 독차지할 수 있다니….
# 보성에 명품 흑초가 있다
보성에는 ‘초루’가 있다. 식초를 담는 곳이다. 보성에서 차가 아니고, 술도 아닌 식초라니…. 낯설어 보이지만 식초는 확장 가능성이 높은 발효 식품이다. 우리나라가 유독 식초에 대한 관심이나 이해가 모자라고, 양조 경험도 얕기 때문에 더 그렇다. 식초의 가능성을 확신하게끔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으로 ‘과소평가됐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만 해도 300년 넘는 식초 장인 가문이 여럿 있다. 특히 가고시마(鹿兒島)현에는 흑초를 빚는 50년 내력의 양조회사가 지역의 관광산업을 이끈다. 농장 겸 레스토랑에서 양조과정 견학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흑초를 넣은 건강 음식이나 흑초로 만든 음료 등을 판다. 현미로 만든 흑초는 일본에서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높다. 시판 식초 음료만 30종이 넘는다.
중국에는 ‘4대(大) 명 식초’가 있다. 그중 하나가 전장(鎭江)시에서 만드는 ‘전장샹추(鎭江香醋)’다. 전장시는 식초문화박물관을 짓고 ‘식초 도시’로 발돋움했다. 식초 하나가 도시를 살리고,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사례다.
식초는 크게 합성식초와 양조식초로 나뉜다. 합성아세트산을 희석한 것이 합성식초이고, 발효로 만드는 게 양조식초다. 양조식초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공장표 양조식초’는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소량의 주원료에 주정(알코올)을 이용해 속성 발효시키는데, 초루의 식초는 이런 말뿐인 양조식초와는 다르다. 누룩과 현미, 그리고 지하 80m 암반층에서 끌어올린 물. 이 3가지에 가장 중요한 ‘시간’이 더해진다. 알코올 발효와 초산 발효를 거쳐 최소 3년이 지나면 초루의 식초가 완성된다.
# 2000개 항아리에서 식초가 익는다
좋은 식초를 만드는 데는, 수많은 노하우가 있다. 재료의 질이나 선도는 물론이고 온도와 습도부터 다양한 기상 조건에 따라 민감하게 좌우되는 발효공정 때문이다. 날씨와 기온 변화에 따라 신경 써야 하는 게 하나둘이 아니다. 같은 식초라 할지라도 와인이나 커피에 못잖을 정도로 여러 겹의 차이가 있다.
사실 초루를 말하면서 식초 제조공정만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초루는 ‘6차 산업’을 지향한다. 관광객을 불러들여 견학과 체험, 명상 등을 제공하는 명품 관광코스가 되려고 한다. 포도밭을 둘러보고 와인 맛을 즐기는 와이너리 투어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초루는 전략적 설계로 탄생했다. 식초를 먼저 만들다가 사업 다각화를 선택한 게 아니라 ‘6차 산업 사업’ 진출이란 목표를 세우고 발효식품 중에서 고른 게 식초다. 지난 10년은 초루가 식초 양조를 공부하고 연구해온 시간이었다. 출발이 이랬으니 초루에는 ‘식초 장인(匠人)’ 같은 스토리는 없다. 그게 약점이면서 한편으로는 강점이다. 강점은 모든 결정이 전략적이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 다양한 사업경험을 가진 창업주 최진섭(68) 씨의 경영능력이 있다. 사실 지역관광 콘텐츠에 부족한 건 ‘장인의 고집’보다는 ‘창조적 유연성’이다.
초루는 오봉산 아래 저수지를 끼고 이어지는 긴 오솔길 끝 막다른 자리에 있다. 오지 느낌의 막다른 길 끝이라 비밀스러운 별천지 같은 느낌이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건 항아리다. 초루에는 식초가 익어가는 옹기 항아리 2000개가 있다. 항아리가 늘어선 모습만으로도 장관이다.
거기서 숲길로 좀 더 들어서면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 낮은 자리에 지은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 나온다. 흑초로 만든 음료를 맛보고 명상과 체험을 하는 공간이다. 사방으로 창을 내고 내부공간을 빙 둘러 툇마루처럼 냈다. 201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건축가의 설계다. 초루는 조 건축가의 대표작인 제주 오설록 티 뮤지엄의 다도 체험공간 ‘티스톤’과 느낌이 비슷하다.
초루의 메뉴 개발은 농업회사법인 대표인 최 씨의 아내 한상미(64) 씨가 전담한다. 시행착오 끝에 완성했다는 초루의 흑초 음료는 눈으로 보기에도 좋았고, 맛은 더욱 훌륭했다. 곁들여 내는 디저트나 다과도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메뉴마다 오감을 고려한 세심한 균형과 기품이 느껴졌다. 초루가 일대에 소유한 땅이 자그마치 188만4297㎡(약 57만 평). 초루는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될까.
# 뿌리깊은 나무, 여기서 뿌리내리다
보성군 벌교읍 금화산 아래 징광리에는 문화단지 ‘징광문화’가 있다. 징광문화를 이끌고 있는 한무논(42) 대표가 질색할 게 분명하지만, 징광문화를 얘기하면서 잡지 ‘뿌리깊은 나무’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징광문화는 무논 씨의 부친인 고 한상훈 씨가 만든 문화단지다. 한 씨는 전설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기업인이자 언론인 고 한창기 씨의 동생이다. 형을 도와 뿌리깊은 나무의 문화사업부에서 일했다. 그는 회사에서 순천과 하동에서 차를 사다가 파는 일을 주로 했다. 그 바람에 전국 각지의 명산, 명품을 찾아다니며 안목을 넓힌 그는 고향 땅을 사들여 차밭을 일궜다.
수중의 돈을 다 털고, 전세보증금까지 빼서 땅을 샀다. 이렇게 사들인 땅이 72만6000㎡(22만 평). 그곳에 전국을 찾아다니며 구한 야생차나무 씨앗을 심었다. 씨앗으로 일군 차밭이었으니 수확까지 자그마치 15년이나 걸렸다. 1995년에야 처음 찻잎을 수확했는데, 야속하게도 그해 산불이 크게 나서 차밭의 90%가 타버렸다. 활활 타는 차밭 앞에 주저앉아 펑펑 울던 아버지를, 한 대표는 기억했다. 다 끝나버린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이듬해 봄 타버린 폐허 속에서 기적처럼 차나무 새순이 돋았다. 지금의 차밭 39만6000㎡(12만 평)는 아버지의 눈물을 딛고 그렇게 살아남은 것이다.
징광문화 차밭은 사실 제대로 된 땅이 거의 없다. 가파른 지형이나 돌투성이, 그것도 아니면 조각조각 나 있는 맹지였다. 마구잡이로 땅을 사들이니, 땅 주인은 좋은 땅은 두고, 거친 땅만 팔았다. 그런 땅에 산불까지 지나갔으니…. 비료나 농약을 절대 치지 않으니 차밭은 고사리, 억새, 찔레, 산딸기, 칡덩굴이 온통 우거졌다. 차를 따는 이른 봄이 아니면 들어갈 엄두도 못 낼 정도다. 이런 차밭에서 딴 찻잎을 전통방식 그대로 덖어 만든 차가 징광잎차다. 이렇게 만든 차는 ‘없어서’ 못 판다. 올해 따서 덖은 차도 벌써 다 팔리고 없다.
# 징광문화에서는 무엇을 봐야 할까
징광문화에서는 옹기도 만든다. 항아리는 요즘 수요가 줄어서 주로 조형미가 돋보이는 생활 용기를 만든다. 징광문화를 찾아가면 잘 가꾼 정원을 산책하거나 마당 가득 늘어놓은 항아리와 전시장의 옹기를 구경할 수 있다. 방문 전에 예약하고 비용을 내면 징광의 야생 녹차를 시음하거나, 징광옹기로 그 자리에서 쪄낸 시루떡도 맛볼 수 있다.
바빠서 못 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여유 있는 시간이라면 차 시음 접대도 한다. 늘 문을 열어두고 있으니 문밖에서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다만 한창 바쁠 때는 응대가 없더라도 서운해하지 말기를…. 그럴 때면 마음 가는 대로 둘러보고 가면 된다.
한 대표는 뿌리깊은 나무와 큰아버지 얘기를 되도록 피하고 싶어 했다. 명성을 이용해 제 잇속을 차리는 이들로부터 입어온 수많은 상처 때문이라고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빚을 남기고 세상을 뜬 큰아버지의 박물관 건립 유언을, 숙제처럼 짊어진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었던 고초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가 아직도 서운하다 생각하는 건, 고인의 유지를 지키도록 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박물관 건립을 고향인 보성군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결국 뿌리깊은나무박물관은 2011년 이웃 순천의 낙안읍성 옆에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한창기·상훈 형제는 성향이 전혀 달랐던 듯하다. 형이 낭만적인 방랑가 기질의 지식인이었다면, 징광문화를 이끌던 동생은 묵묵한 실천가에 가까웠다. 형이 작고한 이듬해에 동생도 세상을 떴다. 이들 형제가 생전에 공유했던 ‘한국인의 참모습’을 찾는다는 정신이, 징광문화에서 가계로, 또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
# 득량만과 득량역, 그리고 추억
보성에는 득량만이 있다. ‘얻을 득(得)’에 ‘양식 량(糧)’을 쓴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와중에 식량을 구한 곳이라 붙여진 지명이라지만, 이런 유래보다 신기한 건 ‘식량을 얻는다’는 뜻의 득량만이 1937년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으로 거대한 논이 됐다는 것이다. 땅이름이 곧 미래를 내다본 예언이었던 셈이다.
득량에는 1930년 경전선 개통과 함께 지어진 득량역이 있다. 쇠락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디자인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레트로 느낌의 관광지로 단장돼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역과 역 앞 골목에는 1970년대쯤의 시간을 복원한 추억의 공간이 조성돼 있다. 역전이발소, 행운다방, 동명상회, 꾸러기문구사….
이게 반응이 괜찮으니 득량역을 내세운 사업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더해졌다. 중복 지원한 사업예산으로 득량역 주변 추억의 공간은 그때마다 조금씩 넓어졌다. 벽화가 많아졌고, 그림도 화려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공간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업이 중단되는 순간, 발길은 끊기고 골목은 방치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사업이 진행되면 그때뿐이고,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사업이 지나갔고, 득량역은 측은한 느낌으로 다시 쇠락 중이다.
득량면에는 광주 이씨 집성촌 ‘강골마을’도 있다. 강골(强骨), 약골(弱骨) 할 때의 그 강골이 아니라, 방조제가 놓이기 전에 마을 앞까지 바다가 강물처럼 넘실거려 ‘강곡(江谷)’이라 불리던 마을이다. 솟을대문까지 갖춘 제법 규모 있는 종택과 고색창연한 한옥, 그리고 바람에 쏴 하는 소리를 내는 대숲과 수백 년을 자란 굵은 소나무를 두루 거느린 마을이다. 그렇다고 민속촌 같은 마을은 아니고, 고색창연한 한옥부터 시멘트 기와를 얹은 광복 전후의 집과 1970년대쯤 슬레이트 지붕이 서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마을이다.
# 강골마을 ‘시즌2’를 준비하다
강골마을에서는 주민과 여행자가 의기투합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던 때가 있었다. 주민의 환대와 여행자의 선의가 만나서 꽃을 피우던 시기다. 그 중심에 이 마을 출신 이정민 전 도의원이 있었다. 그때 강골마을에서는 보름달이 뜬다고 여행자를 불러 모아 공연을 했고, 고택 마당의 딱 두 그루 철쭉에 꽃이 피었다고 축제를 열었다.
강골마을에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보통 마을 협동조합은 주민들로 구성하는 법인데, 이곳의 조합은 특이하게도 주민보다 여행자인 외지인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마을을 사랑했던 여행자들의 후원에 가까운 출자가 바탕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마을 주민들 사이에 고택 활용에 대한 이견이 생기며 사업은 비틀거렸다. 이런 와중에 코로나 팬데믹이 겹쳤고, 설상가상 마을체험장에 큰 화재까지 났다. 마을 협동조합은 출자금을 돌려주고 해체 수순을 밟는 중이다. 협동조합 실험이 실패로 끝나는 것 같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강골마을에서 다시 다른 실험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 의원의 아들을 비롯해 20대 마을 젊은이들이 마을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이른바 ‘강골마을 시즌2’다. 젊은이들은 ‘한옥마을에서의 캠핑’을 비롯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들이 가꾸는 전통마을은, 그리고 마을주민과 여행자의 교유는 어떤 모습일까.
보성에는 차만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보성은 고여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 ‘고택의 멋’ 춘운서옥
보성에는 ‘춘운서옥(春雲書屋)’이 있다. 복원 고택의 아름다움을 살린 카페 겸 숙소다. 춘운(春雲)은 건축가이자 고미술품 수집가인 주인의 호. ‘봄에 부지런한 사람’이란 뜻이고, 서옥(書屋)은 ‘고서가 많은 집’이란 의미다. 춘운서옥의 숙소 공간은 150여 년 전 지어진 ‘임진영 가옥’이다. 바닷물에 3년 담갔다가 다시 3년을 말린 소나무로 10년 동안 지은 집이다.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이 집을 복원해 숙소공간인 안채로 삼고, 웅치면에서 뜯어온 ‘안용섭 고택’을 짜 맞춰 카페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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