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간 이끼와 삼나무가 주인...인간은 찰나를 스쳐갈 뿐
수년 전 일본에 사는 지인이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이끼가 가득한 초록 계곡은 신비의 숲이었다. 그곳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원령공주>의 배경지이자 수령이 무려 7,200년인 삼나무 조몬스기繩文杉가 살고 있는 야쿠시마屋久島. 일본 최남단 남규슈 가고시마에서도 60km나 떨어진 곳이다. 그때부터 야쿠시마를 향한 그리움을 품었다.
혼슈, 히로시마, 규슈 여행 계획을 세웠지만 야쿠시마는 규슈의 최남단인 가고시마에서도 배나 항공기를 이용해서 가야만 하는 섬이라 선뜻 결정을 못 했다. 그러나 일본여행 중 만나는 일본인들마다 강추하는 최고의 여행지이자 평생 꿈꾸고 살아가는 곳이 바로 야쿠시마였다.
"그래 가자, 야쿠시마."
가고시마를 출발한 페리는 약 2시간이 채 걸리지 않고 미야노우라항宮之浦港에 도착했다. 1993년 일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야쿠시마는 제주도 면적의 5분의 1. 둘레는 132km. 전체 면적의 90%가 산림이고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 중앙에는 일본 100 명산 중 하나인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1,936m)가 있다.
수천 년 야쿠스기의 비밀은 '척박한 땅'
섬 전체가 커다란 화강암인 야쿠시마에는 '1년 365일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강수량 덕분에 화강암 위에 모래가 쌓이고 이끼가 자라면서 토양이 형성되었지만 그 두께는 불과 30cm 남짓이다. 환경적 열악함으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야쿠시마의 삼나무는 성장속도가 무척 더디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자라는 데 5년 넘게 걸린다. 그 척박함 덕분에 다른 지역의 어떤 삼나무보다 훨씬 장수하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자라니 나이테 간격이 촘촘하고 수지도 풍부해서 쉽게 썩지 않아 건축자재로서도 으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에 사찰을 신축하면서 야쿠시마의 삼나무도 무차별 벌목의 대상이 돼 잘생기고 쭉쭉 뻗은 삼나무들은 채벌되고 못생긴 나무들만 살아남았는데 대표적인 삼나무가 조몬스기이다. 삶의 아이러니다.
야쿠시마의 천 년 넘은 삼나무들은 야쿠스기라고 부른다. 1,000년, 2,000년, 3,000년을 넘어서 7,000년까지. 이곳에서 사람은 그저 찰나를 살아갈 뿐이다.
원령공주가 사는 숲, 시라타니운스이쿄
내 두 발로 걸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직 조몬스기를 만난 것도 아닌데 시라타니운스이쿄白谷雲水峡를 잠시 걸은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감동이 밀려온다. 시라타니운스이쿄는 해발 600~1,300m, 면적 424헥타르에 펼쳐 있는 원령공주의 배경이 된 야쿠시마 삼나무 숲이다. 삼나무들이 살고 있는 숲은 이끼가 가득한 몽환의 풍경이다. 전 세계 이끼의 3분의 2가 야쿠시마에 서식하고 있다니 야쿠시마의 주인은 삼나무도 사람도 아닌 이끼인 셈이다.
도착 첫날 운 좋게도 365일 비가 내린다는 야쿠시마에서 쾌청한 하늘을 보고 멋진 시라타니운스이쿄 협곡을 만난 것에 감사했다.
산책로는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아서 나무뿌리가 무성한 길이 많다. 계단이라곤 나무판자와 삼나무 껍질을 이어놓은 것이 전부. 안전을 위한 펜스라곤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먼저가 아닌 자연이 먼저인 숲이다. 초록 원시림이 보기만 해도 싱그럽다. 사람냄새라곤 전혀 느낄 수 없다.
세 개의 코스 중에서 야요이스기弥生杉 삼나무 코스는 조금 단조롭다. 가능하면 부교스기奉行杉 삼나무코스와 다이코이와바위太鼓岩 왕복코스를 추천한다. 부교스기 삼나무 코스는 3개 코스 중에서 계곡이 많아 깊은 숲을 느끼기에 더욱 좋다. 다만 비가 많이 오거나 온 이후에는 장화를 신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곳이 많다. 오르내림이 계속되고 계곡을 많이 건너니 시간도 여유롭게 가지고 걸으면 좋다. 다이코이와바위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눈 아래 펼쳐지는 야쿠시마의 숲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조금 지나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 무대가 된 '고케무스노 숲'이 있다. 이 숲의 짙은 녹색을 표현하기 위해 영화에선 200종류 이상의 녹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녹색, 녹색… 온통 녹색의 땅
야쿠스기랜드는 해발 1,000~1,300m에 조성된 삼나무 숲으로 시라타니운스이쿄와 함께 야쿠스기를 즐감하며 산책할 수 있다. 비교적 평탄한 코스이고 산행 초보자에게도 적당하다. 우중에도 비교적 안전하다. 광대한 숲에는 30~150분 코스까지 다양한 코스가 있어서 선택의 즐거움도 있다.
야쿠스기랜드에 갔다면 야쿠스기 자연관을 방문하자. 야쿠스기 자연관에는 야쿠시마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 오래전 벌목하던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2006년 폭설에 부러진 조몬스기의 나뭇가지도 전시되어 있다.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시대부터 살아와서 조몬스기라 부르는 거대한 삼나무를 만나려면 시라타니운스이쿄나 아라카와荒川 트레일을 통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아라카와 트레일을 선호한다. 아라카와 트레일은 편도 11km. 왕복 22km, 최소 9시간을 걸어야 하니 녹록하지 않은 길이다.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부터 벌목한 삼나무를 옮기기 위해 설치한 도로코 열차 선로를 따라가는 약 8km의 길은 평이하지만 다소 지루하다, 그 이후엔 가파른 길을 약 3km 걸어야 한다. 동트기 전에 출발해야 해 질 무렵에 돌아올 수 있다. 3월부터 11월까지 아라카와 트레일 입구까지는 개인 소유 차량의 출입이 불가하고 이곳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새벽 4시. 미야노우라항에서 아라카와 트레일 입구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비수기에 셔틀버스는 1일 1회만 운항을 하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새벽 5시 26분 등산로 입구에 도착. 등산로 입구의 시설이라곤 화장실과 휴게소가 전부이다. 이미 많은 일본 현지인들이 그 이른 시간에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대부분 가이드와 함께 산행하는 사람들이다.
혹시 단체로 출발하는 팀이 있으면 후미에 슬쩍 붙으려고 했는데 출발할 기미가 없다. 초행, 혼산 그리고 돌아갈 버스를 오후 4시 30분에 타야 한다는 조급함이 더해져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5시 35분에 출발한다. 다행히 비가 올 기미는 전혀 없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곳 말고는 온통 세상이 새카맣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일본 사람들의 말소리조차도 반갑고 친근하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고스기다니小杉谷 도착. 이곳은 한때 인구 540명까지 살고 소학교와 중학교가 있었을 만큼 큰 마을이었으나 1970년대에 벌목이 금지되면서 폐교가 되었다.
쿠스가와 갈림길 도착. 여명이 밝아오고 불빛의 도움 없이도 걸을 만하다. 이곳에는 화장실이 있고 시라타니운스이쿄로 갈 수도 있다. 선로구간 중간 즈음에 삼대삼나무三代杉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삼대삼나무'는 손자부터 할아버지까지 한 나무에서 함께 살아간다. 1,500년 전 1대 삼나무가 벌목된 이후 남아 있는 밑동에서 2대 삼나무가 자라다가 350년 전에 두 번째 벌목되었는데 벌목된 자리에 다시 3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철길이 끝나는 오카부 등산로 입구까지는 3시간이 걸렸다. 작은 2층 건물이 있고 무척 깨끗한 화장실도 있다. 오랜만에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 느낌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식수가 있어서 식수 보충도 가능하다.
시인을 부른 7,200살 조몬스기
이제 조몬스기까지는 약 3km도 채 남지 않았다. 산길로 접어드니 대부분 경사도가 급한 나무계단이다. 그 계단은 자연을 최소한으로 해치는 범위 내에서 나무뿌리와 돌을 연결해서 만들어서 사람이 걷기에는 불편하다. 그 길에선 참으로 다양한 삼나무들이 반겨준다. 대부분 2,000년 이상 된 삼나무들이다. 부부삼나무, 대왕삼나무. 윌슨그루터기뿐 아니라 이름은 없어도 다양한 모양의 삼나무들이 가득하다. 삼나무 둘레를 돌면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놀다 보니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윌슨그루터기ウィルソン株는 야쿠시마에서 조몬스기만큼이나 사랑받고 있다. 동굴처럼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 안쪽은 어른 20명은 충분히 둘러앉을 수 있을 만큼 넓다. 그루터기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면 아주 사랑스러운 하트 모양이라 더 유명해졌다.
그런데 왜 윌슨이란 이름이? 1914년, 야쿠시마섬의 식생을 연구하기 위해 찾았던 영국 출신의 미국 식물학자 윌슨 박사가 바로 이 숲속에서 폭우를 만났는데 그때 비를 피했던 그루터기이다. 야쿠시마 식물 관련 논문을 발표하며 비를 피한 그루터기를 소개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윌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루터기 안쪽에는 샘이 솟아 흐르고 작은 사당도 있다.
윌슨을 만나고도 한 시간이나 걸렸을까? 드디어 전망대가 보인다. 조몬스기이다. 뿌리 부분은 흙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물로 묶어 놓았다. 그리고 전망데크를 만들어서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언덕에 홀로 서있는 조몬스기는 나이는 많았지만 아직도 정정한 모습이다. 나무 둘레 16.4m, 높이 25.3m. 7,000년 넘게 오롯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일본의 시인 야마오 산세이는 조몬스기를 '성스러운 노인'으로 불렀다. 그는 1977년 도쿄에서 식구들과 함께 야쿠시마로 이주해서 죽기 전까지 농부와 시인으로 살았다. 그는 '왜'라는 시에서 조몬스기가 자기를 야쿠시마로 불러주었다고 했다.
'왜 너는 / 도쿄를 버리고 이런 섬에 왔느냐고/섬사람들이 수도 없이 물었다. / 여기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 무엇보다도 수령이 7,200년이 된다는 조몬 삼나무가 / 이 섬의 산 속에 절로 나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지만 / 그것은 정말 그랬다. / 조몬 삼나무의 영혼이 / 이 약하고 가난하고 자아와 욕망만이 비대해진 나를 / 이 섬에 와서 다시 시작해 보라고 불러 주었던 것이다.'
방문객들이 계속 바뀌어도 한참을 조몬스기와 마주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이별의 서운함보다는 그리워하던 이를 보았다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기쁨이 충만했다.
날은 살짝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아 산행에는 최적의 날씨이다. 산행을 시작했던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로 돌아가면서 시라타니운스이쿄로 하산할까 잠시 생각을 했지만 어둠 속 바쁘게 스쳐 지나갔던 길을 천천히 느끼며 아라카와 등산로 입구로 돌아왔다.
붉은 바다거북 최적의 산란지
조몬스기만 알고 온 야쿠시마. 바다 또한 매력적이다. 사람 보기가 힘들 정도로 조용한 마을. 그냥 걷고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이 저절로 묻어난다. 남태평양 어느 무인도에 온 느낌이다. 바닷물이 정말 투명하고 모래사장은 은가루 뿌린 듯 고왔다.
야쿠시마의 나가타해변은 붉은 바다거북의 산란지로 유명하다. 매년 5~7월 사이 밤에 알을 낳기 위해 무리지어 해변으로 올라온다. 야쿠시마 바다는 화강암이 풍화되어서 다른 해변보다 모래가 가볍기 때문에 바다거북이 산란장소로 최적이다. 산란기가 아니어서 바다거북은 만나지 못했지만 바닷가 곳곳에는 바다거북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산란 모습이 그림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사람보다 원숭이와 사슴이 더 많은 야쿠시마에는 멸종이 임박한 바다거북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보호 활동을 펼치고, 1970년 벌목이 중단된 이후 다시 삼나무를 심으며 최대한 자연의 편에서 숲을 원시 상태로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야쿠시마는 아직 자연 본래의 아름다움 간직하고 있는 섬으로 남아 있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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