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태규 “여성영화제 첫 남자MC 제안 감사” 변영주 “고정 맡아라”
변영주 감독·배우 봉태규
봉 “여성영화제에 여배우 참여 어려워
오히려 내가 발언해야겠다고 생각”
변, 올해 영화제 슬로건까지 제안
“다른 시선으로 세상 보는 영화제”
‘쿵’하면, ‘짝’했다. 한 명이 답을 하면, 다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두 사람의 호흡이 좋다는 관계자의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변영주 감독과 배우 봉태규 말이다. 두 사람은 24일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코파(KOFA)에서 열리는 제2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식의 사회를 맡았다. 변 감독은 벌써 12번째, 봉 배우는 첫 남성 사회자다. 지난 2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들을 만났다.
그동안 여성영화제 개막식 사회는 여성 영화인이 맡아왔으나, 조직위원회는 올해 ‘모두가 함께하는 여성영화제’를 만들어보자며, 봉 배우의 참여 의사를 타진했다. 봉 배우가 그간 “모든 게 남성 중심인 게 불만” “낙태죄 폐지 축하” 등 페미니즘 옹호 발언과 성별 이분법 반대 발언을 해왔던 점을 눈여겨 본 것이다.
변 감독은 “영화제 조직위에서 봉태규씨한테 사회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내게 부탁을 했다. 물어봤더니 (봉 배우가) 바로 ‘알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봉 배우는 “어떤 식으로든 여성영화제에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터라, (사회자) 제안을 받았을 때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답변이 끝나자마자, 변 감독은 “앞으로 고정 사회자 하자”고 제안했다. “저야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봉 배우는 “권해효 배우가 20여년째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보고 있는데, 사회를 맡다보니 ‘독립영화계를 지켜보는 증인’이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더라고 꼽더라”며 “저도 계속 사회 맡고 싶다”고 다시금 말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성 감독 수백명을 배출한 세계 최대 여성영화제다. 여성영화제가 시작한 1997년 여성 감독의 수는 7명에 불과했으나, 25년 동안 부침을 겪으면서도 영화제는 매해 새로운 여성 감독들을 발굴하고 있다. 올해는 세계 71개국에서 1251편의 작품이 출품돼, 역대 최다 국 참여, 최다 출품작을 기록했다.
“여성영화제는 여성이 옳다고 말하는 영화를 상영하는 게 아니라, 여성의 시선으로 보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에 관한 영화제”라고 변 감독은 설명했다. 그는 “그 다른 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변 감독은 여성영화제와 첫 회부터 함께 해왔다. 2019년 그가 여성 이슈와 현안으로 활동한 단체와 개인에게 상을 주자고 제안해 ‘올해의 보이스’ 부문이 만들어졌다. 변 감독은 “대한민국 여성 현실을 위해서 애쓴 사람들이 와서 함께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분들이 영화제에 올 수밖에 없도록 상을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추적단 불꽃, 서지현 검사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올해는 56년 만에 ‘미투를 외친 최말자씨와 성소수자부모모임 등에게 상이 돌아간다.
올해 여성영화제 슬로건은 ‘우리는 훨씬 끈질기다’이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백래시가 정책에까지 반영되는 요즘 현실에 대항하겠다는 취지다. 이 또한 변 감독의 아이디어다. 변 감독은 “관계자들이 모인 단톡방에 나온 처음 아이디어가 마음에 안 들어서(웃음) ‘설마 채택되겠냐’는 심정으로 냈다. 다른 분들 제안 중에 좋은 게 많았는데 어쩌다 보니 우아하지 않은 내 아이디어가 채택됐다”며 웃었다. 옆에서 듣던 봉 배우가 “직접적이고 엠제트(MZ)세대 느낌이 난다”고 추켜세웠다.
봉 배우는 “여성영화제지만, (백래시 탓에) 영화제에 여성 배우가 참여하는 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조금이라도 ‘페미니스트’ 같은 발언만 해도 비난이 쏟아지는 분위기 등을 언급한 것이다. 그는 “최근엔 그런 분위기가 더 심해진 것 같다”며 “제가 (사회자를) 하는 게 오히려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몇 번 겪어봤으니까”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봉 배우가 여성 인권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 때마다 많은 비난이 쏟아졌다. 봉 배우는 “제가 내린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더 얘기해야 한다’”였다. “제가 잘못된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도 비난하는 거면, 비난하는 게 잘못된 거 아닌가.”
봉 배우가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결혼’이다. 배우자인 하시시박 작가가 임신한 뒤 일감이 줄어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여성이 받는 불합리와 부당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더 놀란 건 엄마와 누나들과 함께 살 때는 몰랐다가, 결혼한 내 파트너를 보고 현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첫 아이가 아들인데, 이 아이는 저랑 똑같이 자라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뭘까 고민하게 됐다.”
그는 “부끄럽지만 결혼 전까지만 해도 여성영화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결혼한 뒤 가부장제를 몸으로 느끼면서, 과거의 영화 현장에서 벌어졌던 언어 성희롱, 위계에 의한 폭력 등을 되짚었다. “20살 때부터 영화 일을 했다. 영화 현장에서 주고받았던 수많은 농담, 저도 같이 섞여서 했던 그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합리했는지 돌이켜봤다. 문제없이 지나간 게 문제였다. 물론 지금 현장은 많이 달라졌다.”
봉 배우는 최근 단편 영화 ‘어느 날 아들이 새우가 되었다’를 찍고 있다. 만삭 여성감독의 작품이다. 봉 배우는 “임신해서 배가 많이 나온 여성감독님을 현장에서 처음 봤는데, 정말 기뻤다”며 “이런 모습들을 현장에서 계속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변 감독은 “이게 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덕”이라고 한마디 보탰다. 변 감독은 “예전처럼 촬영 현장이 권위적이지 않고, 주 52시간도 지킨다. 요즘엔 조감독이 근무시간을 체크하며 ‘감독님 10분 남았습니다’ ‘5분 남았습니다’하고 알려준다”고 했다. ”초과근무 촬영이 필요할 땐 투표를 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촬영 못 한다. 추가 수당은 당연히 지급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보탰다. “젊은 여성분들, 영화·드라마 현장 괜찮은 직장입니다. 비정규직이지만, 4대 보험도 됩니다.” 변 감독은 “여성영화제가 지금은 여성감독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여성작가, 여성 촬영감독 등으로 저변을 넓히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 개막작은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쇼잉 업’이다. “매일 끈기있게 작업대에 앉는 평범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전하는 단단한 울림“(손시내 프로그래머)이 있다. 참고로 다른 영화제에서도 상영하지 못했던 작품이라는 후문이다. 봉 배우는 “요즘 영화계에서 뜨거운 감독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 감독은 김보람 감독의 ‘두 사람을 위한 식탁’과 유지영 감독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을 특히 추천한다. 변 감독은 “‘아시아 단편 경선’의 작품들은 놓치지 마시라. 곧 엄청난 작품을 만들 여성 감독들의 첫번째 발걸음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것”이라고 예고했다. 아울러 “25주년 특별전으로 다시 상영하는 ‘리:디스커버(RE:Discover)’도 놓치지 마시라. 더는 극장에서는 보기 어려운 작품들”이라고 권했다. 특별전에는 샹탈 아커만의 ‘잔느 딜망’, 박찬욱의 ‘질투는 나의힘’ 등이 상영된다.
변 감독과 봉 배우는 이번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찾는 관객들이 기운과 위로를 얻고 가길 바란다. “영화제에 오셔서 세상이 조금 나은 방향으로 바뀔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는 걸 확인한다면, 좀 위로가 되지 않을까요.” (봉 배우)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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