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문서 “살해된 조선인 813명”...본지, 조선총독부 기록 확인

유석재 기자 2023. 8. 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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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일 관계가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 중러 패권주의 등 전체주의의 도전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공유하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생존을 위해 한일은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그렇다고 양국의 역사에 새겨진 과거까지 잊히지는 않는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일본 도쿄 관동대지진 당시 현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학살 사건이 그중 하나다. 관동대지진 100년, 조선인 학살 100년을 맞아 시간 속에서 풍화된 아픈 역사의 흔적을 취재해 연재한다.

본지가 입수한 '사이토 마코토 문서'의 일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인 학살 피해자 추정치가 813명(빨간 원)이라고 적혀 있다. /성호철 특파원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학살과 관련, 당시 조선총독부가 일본 현지의 내무성 집계를 신뢰하지 않고 도쿄출장소 직원을 통해 피살자 수를 독자 조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일본 내무성은 조선인 피살자를 231명이라고 발표했지만 조선총독부는 그해 12월에 자체 집계해 추정치 813명이라는 문서를 남긴 것이다. 문서에는 ‘가나가와현은 추가 조사 중’이라는 단서를 붙여, 조선총독부조차도 보수적으로 잡아도 1000명 이상이라고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를 강점했던 조선총독부가 보기에도 일본 현지의 조선인 사망자 축소가 심했던 것이다.

23일 본지는 일본 스기오 히데야 의원실(입헌민주당)을 통해 입수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문서(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을 지낸 1919~1927년, 1929~1931년 기록된 공식 문서)’를 미야모토 마사아키 릿쿄대학 역사자료센터 조교수와 함께 검토했다. 미야모토 조교수는 10여 년 전 와세다대학 재직시, 일본 국회도서관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 문서 정리를 담당한 인물이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 3개월 뒤인 1923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관동지방 지진의 조선인 현황’ 자료는 ‘살해 조선인 수(數) 문서’에서 “혼란한 상황에서 살해된 조선인 시신은 일반 시신과 함께 빠르게 매장 또는 화장됐기 때문에 사인을 구별하기 어려워 적확한 수치 파악이 어렵다”며 보수적인 수치임을 전제하면서 “조선총독부의 도쿄출장원이 내사한 추정 수는 다음과 같다”고 썼다.

내사 추정치는 도쿄는 약 300명, 가나가와현은 약 180명, 사이타마현 166명, 지바현 89명, 군마현 약 40명, 도치기현 30명 등 총 813명이었다. 이 문서에서 함께 제시한 일본 내무성 집계는 학살 규모를 축소한 흔적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조선인 학살이 가장 심했던 가나가와현의 사망자수는 단 1명으로 기록돼 있다.

사이토 마코토 문서에는 학살 은폐의 정황을 보여주는 문서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각 경찰서에 보낸 5가지 지침이다. ‘매장한 시신은 빨리 화장할 것’ ‘유골은 일본인·조선인 구별이 안 되도록 조치할 것’ ‘살해된 사람인데 이름이 확인됐고 유족이 인도를 신청할 경우엔 유골을 넘길 것’ ‘유족이 아닌 자가 인도를 신청하면 유골을 넘기지 않을 것’ 등이다. 특히 5번째 지침인 ‘기소된 사건인데 피해자가 조선인일 경우엔 빨리 유골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까지 처리할 것’은 은폐 지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침이 일본 본토의 지시를 따른 것인지, 조선총독부 자체 판단인지는 기술되지 않았다.

미야모토 교수는 “은폐의 증거로 볼 수 있는 문서”라며 “당시 3·1운동 직후였기에 조선총독부는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이 전혀져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흔들까봐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유족이 일본에 시신을 찾으러 간다고 할때, 이같이 시신이 누군지 확인해야만 넘겨준다는 식의 대응으로 억누른 것”이라고 했다.

일본 본토보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학살문제를 보다 심각한 문제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문서에는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내 조선인 학살 소식이 전파되는 것을 막았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이른바 ‘유언비어 대책’이다. ‘일본에서 조선인이 살해됐다’는 사실을 전했다가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115명이 조선총독부에 잡혀 형사 처벌을 받았다. 일본 순사에게 잡혔다가 주의받고 석방된 사례도 1337명(128명은 일본인, 나머지는 조선인)에 달했다. 예컨대 ‘9월12일에 비가 오다가 갑자기 멈추고 하늘이 검어졌다. 일본처럼 조선에서도 재해가 발생해 사망자가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가 형사 처벌을 받은 사례도 나온다. 당시 ‘학살’ 뿐만 아니라, ‘지진’과 같은 표현만 써도 총독부의 처벌 대상이었던 것이다.

현재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과 관련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정부가 조사한 바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문서도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미야모토 교수는 “일본 정부의 입장은 ‘사이토 마코토 문서가 사실관계를 입증할 기록이 아니다’라는 게 아니라, 이와 같은 문서를 찾지 못했다는 것으로 안다”며 “다소 이상한 입장이지만, 그게 일본 정부의 현재 공식 입장인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인 얼마나 피살됐나, 공식 조사 없어 정확한 숫자 몰라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문서에 기록된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자 813명’은 조선총독부 도쿄출장소에서 조사한 학살자 수다. 당시 일왕의 직속 기관이던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조사이기 때문에 결국 일본 정부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관동대지진 당시 도쿄에서 발표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본 사법성은 피살된 조선인 희생자 수를 233명이라고 발표했고, 내무성 정보국은 조선인 사망자 231명, 오인된 일본인 사망자 59명이라고 발표했다. 조선총독부 조사와 차이가 난 것은 학살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사 방해와 은폐 공작을 통한 학살 규모 축소가 있었던 방증으로 보인다.

국내 학계는 보통 당시 학살된 조선인의 규모를 ‘6000여 명’으로 보고 있다. 근거는 1923년 12월 상하이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이 보도한 6661명이란 숫자다. 이것은 재일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재일본 관동지방 피재 조선동포 위문단’이 요코하마, 가나가와, 사이타마 지역을 상세하게 조사한 결과였다. 이 조선동포 위문단이 10월 말까지 조사한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 당시 일본 잡지 ‘중앙공론’의 편집자였던 요시노 사쿠조의 자료로, 조선인 피살자가 2613명이라고 했다.

서종진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장은 재일 사학자인 고(故)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이 ‘관동대지진 당시 관동 지방의 조선인 거주자는 약 2만명, 행방불명된 사람은 약 9000명’이라고 산정한 것을 근거로 “독립신문에 보도된 희생자 6661명 통계는 실제 수에 상당히 가까울 것”이라고 했다. 강덕상 관장이 산정한 ‘실종자 9000명’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자와 삶의 터전을 잃고 이주하거나 귀환한 조선인을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2013년 새로운 자료와 수치가 나왔다. 한일근대사 전공자인 강효숙 박사가 1924년 3월의 독일 외무부 영문 자료인 ‘일본에서의 한국인 대학살(Massacre of Koreans in Japan)’을 분석한 결과 당시 학살된 조선인은 모두 2만3058명이라는 것이다. 이 중 경찰이 577명, 군대가 3100명을 학살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당시 관동 지방의 조선인 거주자 수에 비춰볼 때 상당한 오류를 안고 있는 수치라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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