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꼰대’ 잡는 ‘꼰대’가 될 결심
제대로 된 어른들도 필요…귀와 마음 먼저 열어보길
유성환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강의교수·이집트학 박사
역사적 인물에게 짓궂은 별명을 붙여주는 경우가 있다. 13년간 중국을 방랑하며 이상적인 군주를 찾아다녔던 공자를 ‘세계 최초의 폴리페서’로, 아테네 교외에 아카데메이아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던 플라톤을 ‘세계 최초의 일타강사’로 부르는 식이다. 그렇다면 ‘교훈서’라는 것을 써서 후대의 서기관에게 삶의 지침을 제시했던 고대 이집트의 현인들은 ‘세계 최초의 꼰대’라고 불릴만 하다.
고대 이집트의 ‘교훈서’에는 “우주의 질서는 영속하므로 그 예리함이 무뎌지지 않는다”와 같은 불변의 진리에 대한 언급이나 “언제나 겸손하고 탐욕을 경계하라”와 같이 새겨들을 금언도 없지는 않지만, 대개는 “나이가 차고 능력이 있으면 일가를 이루어라”, “윗사람이 좀 부족하더라도 언제나 공손하게 대하라”, 심지어 “높은 사람과 같은 식탁에 앉았을 때에는 절제하는 자세로 조금만 먹어라”처럼 일상생활에서 바로 응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조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교훈서’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세계 최초의 자기계발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자기계발서는 서점에 차고 넘치지만 ‘꼰대’는 공적이 된 지 오래다. ‘꼰대’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꼰대’는 철 지난 은어였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부터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 ‘꼰대’는 원래 아버지나 선생님을 경멸하여 부르던 은어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자신의 경험만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 - 특히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가르치려 드는 독선적인 어른이나 상사’를 지칭하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중년들에게 ‘꼰대’는 “혹시 나도?” 아니면 “설마 내가!”라며 화들짝 놀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곤혹스러운 꼬리표가 되어 버렸다.
‘꼰대’를 거부하는 정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축적된 자신만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마치 삶의 황금률인 양 제시한다든가,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언제 초월할지 모르는 최첨단 사회에서 근면·성실과 같은 과거의 가치관만 구태의연하게 강조한다거나, 이미 번아웃 단계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여전히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 탓으로 돌린다든가 하는 행태가 결코 유쾌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인간사회라면 어디나 통용되는 상식적인 태도나 진심에서 우러난 따끔한 쓴소리마저 ‘꼰대짓’이라고 치부하는 것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모든 조언이나 충고를 ‘꼰대짓’으로 낙인찍는 바람에 우리 사회가 ‘어른 없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필자와 같은 학교에서 삼십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신 교수님 한 분이 최근 SNS에 학생들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요즘 세태에 대한 짧은 글 한 편을 올렸다. 대학이 교육기관이 아니라 취업학원이 되어버렸다는 탄식,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고 인터넷에서 수집한 단편적인 정보로 지식을 습득하려 한다는 불만, 소위 ‘돈이 되는 학과’의 학생들이 보이는 근거 없는 - 아니면 얄팍한 - 우월감과 이들을 부러워하는 다른 학과의 학생들이 보여주는 위화감같이 별로 낯설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종강 전 교수님께서는 ‘꼰대’로 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말씀 하신 모양이었다. “졸업해서 금수저가 되어 살더라도 적어도 자기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악마는 되지 마라”고, 시대를 불문하고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었다. 그런데 듣는 학생이 별로 없어 “허망했다”는 소감으로 글은 끝난다.
방송에서는 연일 유명 멘토들이 나와 이런저런 충고를 하고 패널들은 과도한 리액션으로 화답한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들어서 유쾌하지는 않지만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그런 조언에는 무감해진 지 오래다. 여기서 반전은 ‘젊은 꼰대’들이다. 이십 대 초반의 학생들이 세상을 다 산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 필자도 오며가며 봐온 모습이다. 다른 사람은 ‘꼰대’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과 비슷하게 행동하는 젊은 친구들이 많아지는 사태는 확실히 곤혹스럽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이런 ‘젊은 꼰대’를 바로 잡는 ‘꼰대’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꼰대’라고는 했지만 ‘꼰대 잡는 꼰대’는 제대로 된 어른일 테다. 많이 부족하지만 우선 나부터 그렇게 해보자는 결심이다. 우선 귀와 마음을 먼저 열어야 할 것이다. ‘세계 최초의 꼰대’들이 활약했던 중왕국 시대에 제작된 서기관의 인물상은 하나같이 인체비례보다 훨씬 큰 귀를 가지고 있다. 듣기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시대정신이 이렇게 형상화된 것이리라. 필자는 들을 준비를 마쳤으니 내 사랑하는 ‘젊은 꼰대’들아, 이제 그대들 차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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